비동시성의 동시성 - 고린도후서 4:16~18[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8-04-22 17:26
조회
159
2018년 4월 22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비동시성의 동시성
본문: 고린도후서 4:16~18



설교자로서 사도 바울은 눌변이었지만, 저자로서 사도 바울은 달변이었고, 어쩌면 장광설에 가까울 만큼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기도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은, 사실은 자신의 사도직에 관해 장황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말씀의 한 대목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이 펼치고 있는 선교활동에 관해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잘 알다시피 사도 바울은 선교활동을 하는 가운데 수많은 곤경과 시련을 겪었습니다. 죽음에 이를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며 당국자들에게 붙잡혀 옥살이를 하고 매를 맞기도 했습니다. 또 그가 선교한 교회 내부의 문제들로 늘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이 위대한 사도가 ‘개척’하고 양육한 교회들에 어쩌면 그렇게도 문제들이 많았는지 어쩔 때는 잘 납득이 되지 않을 만큼 문제투성이의 교회들이 많았다는 것을, 우리는 성서의 증언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겪은 여러 가지 어려움 가운데 언제나 어딜 가나 따라 다니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유대주의자들을 비롯한 적대자들과의 논쟁 상황이었습니다. 적대자들만이 아니라 사도들 가운데서도 그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비롯되는 논쟁의 상황에 휘말리고, 바울은 늘 이에 대해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할 일도 많고 갈 길도 바쁜데, 이래저래 제기되는 문제들을 하나하나 수습하면서 나아가려 하니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요?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기에게 부딪힌 문제들을 피하지 않고 언제나 정면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고 실제로 문제들을 해결하며 확신에 찬 답을 주었기에 오늘날까지 가장 위대한 사도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에 앞서는 내용은, 어떠한 경우든 그리스도의 복음을 충실히 전하는 입장을 밝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선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합니다.” 이러한 내용을 핵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율법주의를 떠난 바울의 입장에 대한 비방에 대응해 스스로의 입장을 밝히는 것에 해당합니다. ‘바울 당신은 어째서 사람들에게 예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하도록 요구하지 않소? 당신 편한 대로 말씀을 해석해서 멋대로 전하는 것 아니오?’ ‘요구해야 할 것을 요구하지 않아 사람들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을 쉽사리 생각하도록 만들고 있으니, 그게 교활한 속임수 아니오?’ 이러한 비방에 대해 응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론 삼아 오늘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 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나날이 새로워 갑니다.”
말뜻으로 그렇게 어려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육체적인 삶이 노쇠해가는 것과는 상관없이 언제나 새로운 삶을 사는 자세, 언제나 새로운 삶을 누리는 복을 감사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육체가 노쇠해지는 것은 불가피한 일입니다. 저도 어느덧 몸이 노쇠해가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는 증상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런 증상을 느끼게 되면 대개 위축되고 삶의 활력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노쇠한 삶이 아니라 여전히 젊은 삶을 사는 분들도 많지요? 여전히 모르는 것에 대한 탐구심과 새로운 것에 대한 개방성을 갖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평이하게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쉽게 이해하자면 그렇게 이해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대목에서 그와 같은 의미로, 예컨대 몸은 노쇠해가지만 마음은 젊다든지, 육체는 쇠해가지만 영혼은 새로워진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정확한 말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 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나날이 새로워 갑니다.”
이것은 육체와 영혼의 이분법, 현세와 내세의 이분법과 같은 구도에서 그 의미가 왜곡될 수도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이중성, 곧 ‘겉사람’과 ‘속사람’이 모두 한 주체, 한 인격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유념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낡아가고 있는 것도 현재의 상황이며, 새로워가는 것도 현재의 상황입니다. 그것은 동시에 내 삶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현세에는 고통을 겪고 있지만 내세에 구원을 받는다든지, 지금은 육체의 감옥에 갇혀 있지만 장차 영혼이 자유롭게 된다든지 하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한 몸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을 동시에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개체로서 한 사람의 삶이 노쇠해감에도 불구하고 그와는 정반대로 나날이 새로워지는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역설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앞서 말한 내용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아 있을 때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바울은 역설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다른 본문에서 말했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삽니다.” 우리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힘에 붙들려 있지만 결코 거기에 매이지 않고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매 순간 그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보면, 오늘 말씀은 단순히 늙어도 젊게 살 수 있다 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말은 일종의 비유적 의미를 지닌 것일 뿐, 정작 하고자 하는 말은 매 순간 죽음의 힘에 붙잡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과는 정반대로 동시에 삶의 활력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삶이 어떤 운명적 힘에 내맡겨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매 순간순간을 정말 살아있는 삶으로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그 삶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바울은 역설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재삼 대하면서 떠오르는 말이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은 “비동시성의 동시성(Gleichzeitigkeit des Ungleichzeitigen)”이라는 말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E. Bloch)가 정립한 개념으로, “동시대에 있을 수 없는 것들이 동시대에 존재하는 것”을 뜻합니다.
특별히 블로흐는 1935년,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의 정치ㆍ사회ㆍ문화의 실상을 보며 그 개념을 사용하였습니다. 흔히 독일 바이마르공화국 하면 가장 민주화된 헌법과 정치제도를 갖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른바 가장 근대적인 정치제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 시대는, 19세기 프로이센 왕국 시대의 권위주의적인 전근대 문화가 유지되고 있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히틀러가 주도한 편협한 민족주의에 기초한 전체주의 운동이 형성되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근대에 대한 반동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다다이즘과 같은 초현실주의적인 문화가 탈근대 경향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같은 시대에 어울리기 어려운 것으로 보이는 다른 역사적 시간이 동시대 한 공간에 자리한 것을 두고 블로흐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1930년대 독일의 실상만은 아닙니다. 어떤 시대 어떤 사회이든, 특히 변화의 속도가 현저히 빨라진 근대 이후 모든 사회는 그와 같은 복잡성을 지니고 있고, 그런 만큼 서로 다른 시대를 향유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갈등을 겪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 현상을 가장 선명하게 경험할 수 있는 사회가 오늘 우리 한국사회 아닐까요?
지금 촛불혁명 이후 민주주의와 인권이 신장되는 새로운 시대를 향한 희망과 더불어 그간 세계적 차원의 긴장을 유발하는 일종의 진원과 같은 역할을 맡았던 한반도에 평화체제 형성의 기대가 고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낡은 정치적 폐습, 그리고 대립과 갈등의 논리에 기반한 냉전의식이 한편의 사람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태극기부대’에서, 혐오와 차별의 논리를 자기 정체성의 근거로 삼는 반동적인 기독교 세력에게서, 그에 편승한 정치세력에게서 그 낡은 시대의 실상을 봅니다.
아마도 “비동시성의 동시성”을 더욱 절묘하게 보여주는 영역은 경제의 영역, 기업의 영역일지도 모릅니다. 첨단의 기술로 세계시장을 주도하는 기업들 안에 자리한 전근대적 폐습이 지금 우리 사회의 쟁점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앞선 나라들에서는 19세기말, 늦어도 20세기초에는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권리를 쟁취하고자 하는 행위는 어떤 이유로든 침해받지 않아야 한다는 규범이 일반화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초일류기업이라 불리는 기업 안에서 ‘무노조경영’이 신성한 금과옥조처럼 지켜져 왔습니다. 그 때문에 고통을 겪어야 했던 사람이 숱하게 많습니다.
마침 지난 주간 간접 고용노동자를 직접 고용함과 더불어 그 방침을 철회하기로 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있어 다행이기는 합니다. 그 방침을 철회하게 하는 데 기여한 숨은 공로자는 이렇게 술회하기도 했습니다. “나이 마흔 세 살에 ‘노동3권’을 처음 배웠다. 머리가 띵했다. 왜 아무도 나한테 그걸 알려주지 않았을까?”
그 기업 안에서 철옹성 같은 원칙이 무너지게 되어 반갑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사태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최상의 안전한 조건 안에서 최상의 서비스를 해야 할 항공사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를 어찌 이해해야 할까요? 결코 사유화된 기업이라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지분을 근거로 사실상 사유화하고 있는 창업주 가족의 족벌세습과 막무가내 전횡은, 지금 우리가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지 의심하게 할 정도로 참담한 지경입니다. 그처럼 어울리지 않은 시대가 공존하는 우리사회의 한 단면입니다.

특별히 놀랍도록 예민한 감각과 통찰력을 지닌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인격 안에서 그 두 시대가 공존하고 있는 것을 체감합니다. 이로써 우리로 하여금, 우리 안에 존재하는 두 시대, 아니 그보다 훨씬 많은 시대를 분별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일깨웁니다.
아마도 우리들 대다수는 우리 안에서 경험되는 다양한 시대의 공존을 아무렇지 않게 편의적으로 정당화하며 살고 있지 않을까요? 속칭 ‘진보 꼰대’라는 말은 우리 사회의 특정한 세대, 특정한 경험을 했던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로 통용되고 있는데, 이는 그 현상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입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특별한 문제의식 없이 자기편한 대로 모순된 시대 감각과 생활 태도를 얼버무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사도 바울의 이야기는 무척 부담스럽고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중요한 진실은, 그 불편한 각성 가운데서 무엇이 우리를 진정한 구원의 삶으로 인도하는지 분별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말씀 바로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를 살리신 분이 예수와 함께 우리도 살리시고, 여러분과 함께 자기 앞에 세워 주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더불어 오늘 본문말씀에서 말합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딛고 일어난 사건, 그 의미를 따라 사는 삶, 그 삶은 지금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을지라도, 그 삶을 그리며 나아가는 것이 구원의 길로 향하는 것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다행인 것은, 그 삶이 결코 보이지 않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우리는 지금 실감하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아직 한 사람 한 사람의 일상이 크게 달라졌다고 느낄 만큼 변화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분노와 탄식으로 하루하루를 시작하는 것과는 다른 시대를 지금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얼마나 다행인지요?

우리가 죽음을 딛고 일어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당당히 고백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우리를 옭아매는 낡은 삶을 떨치고 진정으로 새로운 삶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그 삶을 누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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