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 분계선은 없었다 - 사도행전 16:23~34 [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8-04-29 23:19
조회
174
2018년 4월 29(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애초 분계선은 없었다
본문: 사도행전 16:23~34



지난 주간, 특히 지난 금요일 얼마나 흥분된 상태에서 보냈습니까? 남과 북을 갈라놓은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북의 정상이 만났습니다. 단지 5센티미터 밖에 되지 않지만, 남북이 분단된 때로부터 하면 73년, 휴전 시점부터 하면 65년 남북을 가르고, 사실상 남북 체제를 유지시키는 엄청난 장벽 역할을 해온 그 분계선을 북의 정상이 넘어 왔습니다. “저는 언제 분계선 넘어갈 수 있습니까?” “지금 넘어가 볼까요?” 이 또한 극적이었습니다.
이미 여러 차례 남과 북의 인사들이 넘나들었지만, 북의 체제를 대표하는 사람이 그 경계선을 넘은 의미는 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뜻이 있다면 넘어서지 못할 장벽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 역사적 쾌거입니다. 이로써 분단의 상징이었던 분계선은 평화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평화, 새로운 역사”, 그 역사가 시작되는 감격적인 시점에서 오늘 본문말씀을 마주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사도 바울에 관한 이야기로서, 좀 이례적인 성격을 띤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에 관한 이야기에서 기적 이야기는 흔치 않은데, 이 이야기는 초자연적인 기적 사건을 전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 일행이 빌립보의 감옥에 갇혔을 때 지진이 일어나 감옥 문이 열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의 초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한 시대 19세기에 서구 신학자들은 논란을 벌였습니다. 빌립보에서 그런 사건이 일어난 것이 사실이냐를 문제 삼았고, 오늘 본문을 사도행전에서 해석하기 가장 곤란한 본문 가운데 하나로 보았습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하지만, 그 기적이 사실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쓸데없는 일입니다. 그 이야기가 전하는 진실이 무엇이냐, 그 이야기의 초점이 무엇이냐를 문제 삼으면 기적 사건의 사실 여부는 전혀 문제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 기적 이야기가 전하는 진실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말씀을 다시 환기해보겠습니다. 사도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의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됩니다.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는 자신들이 갇혀 있다는 사실에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 때 지진이 일어나 감옥의 터전이 흔들리고 문들이 열렸으며 죄수들의 수갑과 차꼬가 풀렸습니다. 잠에서 깨어 갑작스런 그 사태를 알아차린 간수는 틀림없이 죄수들이 다 탈옥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자결하려 합니다. 문책이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순간 바울이 큰 소리로 외칩니다. “몸을 해치지 마시오. 우리는 그대로 있소” 당신이 문책을 당해야 할 일이 없으니 절망하지 말라는 외침이었습니다. 그 극적인 사태를 경험하고 이방인 간수는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간수는 바울과 실라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 대접을 합니다.

이 극적인 기적 사건의 진실은 바울과 실라의 자유함에 있습니다. 그들에게 감옥의 장벽은 처음부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감옥의 장벽 안에 갇힌 상태에서도 그들은 스스로의 행동에 제약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대로 아무런 거리낌없이 기도하고 찬송을 했습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장벽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그 어떤 장벽도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애초부터 장벽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물리적인 장벽이 무너지고 자신들에게 채워진 수갑과 차꼬가 풀렸음에도 불구하고 탈옥하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는 사실이 역설적으로 증언해줍니다. 이미 없는 장벽이기에 그 장벽을 넘어서는 것도 새삼스러울 것 없습니다. 바울과 실라의 마음은, 그들의 믿음은 그 어떤 조건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감옥의 장벽은 사도의 일행을 불온하게 여기는 당국이 그어놓은 선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체험한 사건은 마치 다니엘이 경험했던 사건을 연상시킵니다. 페르시아 국가 신을 숭배하라는 다리우스 황제의 법령을 어긴 죄로 사자굴에 갇혔지만 다니엘은 그 안에서 무사히 살아났습니다. 세상의 지배적인 법칙이 우리를 압도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참 생명을 지켜주는 길이 아닐 때, 그것을 거부하고 참 생명의 길을 따름으로써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 이야기의 진실은, 물리적 차원에서 지진이 일어나고 감옥문이 열렸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감옥문이 열려 있든 닫혀 있든 상관없이 사도 바울과 실라가 그리스도인으로 자유함을 누렸다는 데 있습니다. 그것이 이 기적 이야기의 진실입니다. 그 믿음 때문에 처음부터 그들에게 감옥문은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장애물도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가로막을 수 없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사도 바울과 실라의 이 이야기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전형화된 이야기입니다. 이방인 간수의 놀람 역시 당시 기독교인이 아니었던 일반인들의 놀람을 나타냅니다. 어떤 점에서 그럴까요?
우선 그리스도인들은 당시 일반 사람들이 믿는 신과는 전혀 다른 신을 믿었고, 또한 전혀 다른 방식으로 믿었습니다. 당시 일반 사람들이 믿는 신이 어떤 신들이었을까요? 쥬피터, 디아나, 이시스와 미트라 등입니다. 이 신들은 자신들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제물을 요구하였고, 제관들에게 돈을 기부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 신들은 마치 인간들처럼 자신들의 이해(利害)에 따라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사랑을 펼치시고, 그 사랑을 통해 인간들 사이에서 사랑을 불러일으킨다고 믿었습니다.
그 믿음은 이방인들과는 전혀 다른 윤리관을 형성하였고, 그 윤리관에 따라 전혀 다른 삶을 살게 했습니다. 이방인들, 곧 당시의 일반인들이 자신들이 섬기는 신들의 축제를 위하여 그 축제 비용을 징세 당하고 있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거리와 쓰레기장에 버려진 고아들을 먹여 살리는 공동기금에 자발적으로 기부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광산에서 강제노역을 하거나 섬에 유배된 사람들과 감옥에 갇힌 사람들에게 음식과 약을 주고 친구가 되었습니다. 죽어서도 무덤에 묻힐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과 죄수들에게는 자비로 관을 사서 매장을 해 주었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당시 지배체제의 당국자들에게는 불온한 것으로 여겨졌고, 일반 사람들에게는 경이로운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어떤 지배체제는 그 체제 아래 있는 사람들이 군말없이 그 체제를 용인하고 순종할 때 지켜집니다. 로마의 국법을 따라야 하고, 그 체제를 뒷받침하는 세계관 곧 종교를 따라야 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거슬렀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그 체제에 순응하는 것이 순리라고 믿고 있는데, 그리스도인들은 그 체제가 요구하는 것과는 달리 자발적으로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그러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는 사도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히게 된 사연이 무엇인지 밝혀져 있습니다. 이방인들의 도시 빌립보에서 귀신이 들려 점을 치는 여인을 만났습니다. 여자 노예입니다. 그 여자 덕분에 그 주인들(여러 명인 것으로 보아 어떤 단체, 회사와 같은 형태였을 것)은 돈벌이를 톡톡히 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 여자에게서 귀신을 내쫓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주인들은 자기들의 돈벌이 희망이 사라진 것에 분격해서 바울 일행을 고발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 일행이 감옥에 갇힌 사연입니다.
이 이야기를 잘 음미해보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여인을 자유롭게 한 것입니다. 귀신에 붙들린 상태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누리게 해 준 것입니다. 이 일을 보고 격분한 것은 그 여인이 아닙니다. 그 여자 노예를 소유하고 있는 주인들입니다. 사람들을 자신들의 종으로, 죄인으로 얽어매놓아야 자신들의 욕망과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킬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여인에게 자유를 선사한 바울의 행위는 그들에게 당연히 체제를 교란시키는 불온한 행위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감옥에 갇힌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자신들을 불온하게 보는 시선과 그 시선에 따른 체제와 감옥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귀신에 붙들린 사람에게 자유를 선사하고, 바로 그 일 때문에 감옥에 갇혔으나 그 상황에 아랑곳없이 자유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그래서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선사해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 앞뒤로 제법 길게 이어지는 빌립보에서의 사건에 관한 이야기는 일관되게 그 진실을 밑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뒷이야기를 보면, 이미 사도 바울 일행이 감옥에서 빠져 나가 간수의 집에서 대접을 받고 한 밤을 보냈는데, 아침에 치안관들의 부하들이 석방소식을 알려 옵니다. 바울은 격노합니다. 붙잡아 가둘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슬그머니 석방조치를 취하느냐고 하면서 치안관들더러 직접 오라고 호통을 칩니다. 치안관들이 직접 와서 사과를 하고 공식적인 석방조치를 취함으로써 사태가 마무리됩니다. 그 당당함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앞서 말했듯 우리는 70여년 분단의 세월을 살아왔고, 그 분단은 남과 북의 사회를 각각 체제의 감옥으로 만들어왔습니다. 남쪽이 자유로운 사회라고 하지만, 금기의 선을 넘어설 수 없다는 점에서 강고한 체제를 구축해온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걸 ‘분단체제’ 혹은 ‘이면헌법’이 존재하는 사회라고도 합니다. 그 강고한 체제가 흔들리고 이제 그야말로 ‘평화의 번영’의 시대가 열리는 전환기에 우리는 서 있습니다.
오늘의 이 역사적 전환은 한 순간 이뤄진 일이 아니며, 한두 사람의 결단에 의해 이뤄진 것이 아닙니다. 분단이래 그 엄혹한 체제가 지속되는 가운데서도 그 장벽을 넘어서고자 꿈꾸며 행동해온 사람들이 있었기에 오늘 역사적 순간을 우리는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위대한 자유혼을 지닌 선각자들, 자유를 갈망하는 평범한 민초들의 꿈이 있었기에 가능하게 된 일입니다.
그 역사적 순간을 맞이하며, 그 위대한 자유혼이 갈망했던 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89년 북한을 방문하였던 문익환 목사의 시 <잠꼬대 아닌 잠꼬대>의 한 대목을 환기합니다.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거야 / 기어코 가고 말거야, 이건 / 잠꼬대가 아니라고 농담이 아니라고 / 이건 진담이라고 // ... 난 걸어서라도 갈 테니까 / 임진강을 헤엄쳐서라도 갈 테니까 / 그러다가 총에라도 맞아죽는 날이면 / 그야 하는 수 없지 / 구름처럼 바람처럼 넋으로 살아가는 거지”
오늘 우리가 목도한 놀라운 역사적 사건, 그리고 그 사건을 목도하면서 대하는 오늘 말씀의 의미를 새길 때, 다시 한 번 되새기지 않을 수 없는 꿈의 외침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몫이 무엇인지 일깨워주는 꿈의 외침이기도 합니다.
냉전의 논리에 편승해 상대를 악마화하고, 자신과 동일하지 않은 사람을 정당한 상대로 대하지 않고, 편견에 기초해 혐오와 배제의 논리를 퍼뜨리는 것은 자유인의 몫이 아니며, 그리스도인의 몫이 아닙니다. 그 무엇이든 사람과 사람을 가르고, 그래서 그 어떤 존재이든 자유를 구속하는 장벽에 맞서고,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몫입니다.
오늘 우리가 그 몫을 온전히 감당하기로 재삼 마음가짐을 새롭게 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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