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예언자의 길, 참 신앙인의 길 - 예레미야 23:16~29[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8-06-03 18:11
조회
65
2018년 6월 3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참 예언자의 길, 참 신앙인의 길
본문: 예레미야 23:16~29



지난 주일 말씀을 나누면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지난 주간에는 문익환 목사 탄생 100주년 기념일(6/1)이 있어 31일 심포지움에 발표자로 참석하였고, 1일 기념예배와 박물관 개관식에 다녀왔습니다. 짧은 시간 안에 발표할 글을 준비하는 일은 간단치 않았지만, 그분의 풍요로운 정신세계를 탐색하는 일은 즐거웠고, 또한 잔치에 참여하는 일 또한 기뻤습니다.
분단체제가 무너지고 평화체제의 형성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는 오늘 문익환 목사의 삶은 더더욱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꿈을 현실로 산 신앙의 선구자로서 분단체제의 장벽을 온 몸으로 뛰어넘어 민족의 미래를 보여주고 평화의 희망을 안겨주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 신학자, 시인,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의 선구자 등 여러 이름을 갖고 있는 문익환 목사의 호칭을 어찌 부르는 게 적절한지는 그분의 삶을 평가할 때 늘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1994년 문익환 목사께서 돌아가시고 장례를 준비할 때에는 ‘목사’라 하지 말고 ‘선생’이라고 칭하자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기독교라는 특정 종교의 테두리에 가두는 것이라 생각한 재야인사들의 충정의 발로였습다. 결국 평생의 반려자인 박용길 장로가 북의 김일성 주석도 ‘목사’라 불렀는데 무슨 다른 이름이냐고 해서 결론이 났습니다.
다른 한편 그 이전부터 그와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문익환 ‘목사’라 부르기를 거부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1989년 문익환 목사의 방북 직후 비난여론을 주도하였던 보수 기독교 단체들은 ‘목사’라는 호칭을 떼어버리고 문익환 ‘씨’라고 불렀습니다.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을 신앙과 무관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데다가,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을 껴안는 행위 같은 것은 도저히 목사로서 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 때 그 비난여론이 얼마나 드높았던지 제 기억에도 생생합니다. 자신들이야말로 진짜 신앙인, 진짜 목사이고, 문익환 목사는 가짜 신앙인, 가짜 목사라고 한 것인데, 과연 누가 진짜 신앙인, 진짜 목사일까요? 저는 심포지움 발표문에서 목사로서 곧 목회자이자 신학자로서의 삶과 사회운동가로서의 삶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관점에서 그분의 삶을 조명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앙과 사회적 실천의 관계는 문익환 목사 당대의 문제일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의미를 함께 나누는 가운데, 그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말씀은, 거짓으로 백성을 선동하고 결국 나라를 도탄에 빠트린 거짓 예언자들에게 참 예언자 예레미야가 심판의 선언을 내리고 있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요지는 간결합니다. 먼저 오늘 말씀은, 스스로 예언자를 자처하는 거짓 예언자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말 것을 선포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들은 헛된 말로 백성을 속이고 있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 멋대로 환상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나라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의 심각한 사태에도 불구하고 그 심각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자신들의 관점에서 그 사태가 정상인 듯 호도하고, 나아가 자기의 관점에만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에게 어떠한 재앙도 내리지 않을 것을 말하는 이들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모든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진실을 외면하고 자신들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사람들, 그들을 옹호하는 거짓 예언자들의 실상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18절 이하에서 참 예언자와 대비되는 거짓 예언자들의 실상을 밝히는 이야기가 흥미롭습니다.
“그 거짓 예언자들 가운데서 누가 나 주의 회의에 들어와서, 나를 보았느냐? 누가 나의 말을 들었느냐? 누가 귀를 기울여 나의 말을 들었느냐?”
여기에 아주 흥미로운 표상이 등장합니다. 이른바 ‘천상회의’입니다. 하나님께서 회의를 하는 장면입니다. 참 예언자인가 아닌가를 가르는 중요한 지표 가운데 하나가 천상회의의 참여 여부입니다. 참 예언자는 천상회의에 참여한 반면 거짓 예언자는 참여한 적이 없습니다.
이 천상회의는, 오늘 우리들의 관념으로 보면 낯선 고대 종교의 표상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데서,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를 아는 데서 아주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하나님께서 회의를 하고 토론을 하는 장면을 상상해본 적 있습니까? 성서에는 이렇게 분명하게 그에 관한 언급이 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통념 가운데는 그런 모습이 잘 연상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습을 그릴 때, 그저 위엄을 가진 존재로서 언제나 일방적으로 명령을 내리는 존재로만 연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이 역시 그 앞에 그저 머리를 조아리고 응답하는 모습으로만 연상합니다. 그런데 그런 통념과 달리 성서는 하나님께서 회의를 주재한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자 하나님’이라고 별명을 붙인다면 너무 지나치게 현대적인 표현이 될까요?
그런 하나님의 모습은 매우 중요한 진실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소통하는 하나님의 본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소통, 곧 커뮤니케이션의 과정에 있습니다. 그저 명령이 아닙니다. 예언자는 그 소통의 과정에 참여한 사람입니다. 예언자는 정확히 말해 대변인을 뜻하는데, 그 대변인은 하나님과의 소통을 통해 그 뜻을 확인하고 전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정당의 대변인이 그저 명령을 따라 전달하는 경우와 스스로 합의의 과정에 참여하고 따라서 그 취지를 분명히 알고 전달할 때 얼마나 큰 차이가 있겠습니까?
진정한 예언자는 깊은 성찰 가운데서 진정으로 하나님과 소통한 결과로서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그 말씀은 모든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헤아리는 가운데 선포됩니다. 반면에 거짓 예언자에게는 그 성찰의 과정이 없습니다. “누가 나 주의 회의에 들어와서, 나를 보았느냐? 누가 나의 말을 들었느냐? 누가 귀를 기울여 나의 말을 들었느냐?” 이 말씀은 성찰을 동반하지 않은 거짓 예언자들이 자기의 욕망을 그저 쏟아내는 말, 그것이 마치 진실인양 내뱉는 막말을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제 고집대로만 말하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 다음 이어지는 말씀들도 흥미롭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거짓 예언자들에게 분노를 폭풍처럼 터뜨린다고 하셨습니다. 최후 순간에 두고 보라고 엄포까지 놓으십니다. 이들은 당신의 뜻을 전하지도 않으면서 마치 당신의 뜻을 전한다고 행세하는 것을 도저히 용인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선포하십니다. “내가 가까운 곳의 하나님이며, 먼 곳의 하나님은 아닌 줄 아느냐?” 이 말씀은 거짓 예언자들의 행태와 직결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이들은 왕궁과 성전 가까이에서 항상 움직이는 사람들입니다. 곧 권력의 핵심부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규례에 따라 종교적 의례에서도 엄격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언제나 자신들이 하나님과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따라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에게 선포하십니다. ‘내가 너희들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나는 너희들과 멀리 떨어져 있다.’고 선포합니다. 가까이 계시기도 하고 멀리 계시기도 하는 하나님이라는 고백도 있지만(이사야 57:15), 이 문맥에서는 ‘가까이 있다고 착각 말라. 나는 너희들과 멀리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은 바꿔 말하면, ‘진리를 독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너희들은 큰 오산을 하고 있다’ 하는 뜻입니다. ‘너희의 국가관만 옳은 줄 아느냐? 너희의 사상만 옳은 줄 아느냐? 내가 보기에 너희들이 옳다고 믿는 그것이 오히려 잘못되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27절 이하에서는 이들의 실상이 또 다른 차원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조상이 바알을 섬기며 내 이름을 잊었듯이, 서로 꿈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내 백성이 내 이름을 잊어버리도록 계략을 꾸미고 있다.”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선포한다면서 꿈에서 계시를 받았다는 둥 하는 주장을 펼친다고 했습니다(25절). 이것은 자기가 욕망하는 세계를 그대로 진실로, 현실로 착각하는 이들의 특성을 말해줍니다.
그들의 그러한 환상적 믿음은 골수까지 뿌리박은 바알에 대한 숭배에서 비롯됩니다. 바알이 누구입니까? 그것은 풍요의 신입니다. 그에 대한 숭배는 물질적 풍요를 절대적 가치로 아는 믿음을 뜻합니다. 경제성장제일주의를 말합니다. 반면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보이는 그 물질적 조건을 넘어서 인간사회에 정의를 이루고 평화를 이루어 모두가 자유롭게 사는 세계에 대한 믿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성서는 바알 신앙을 일관되게 배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물질적 풍요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성서의 믿음은 물질적 풍요 그 자체가 최고의 목적이 될 때 인간은 물질의 우상에 종노릇한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뛰어넘는 인간의 구원이 궁극적 목적이 될 때, 물질적 풍요는 상대화될 수 있고 따라서 인간의 자유는 더욱 확대된다는 것이 성서의 믿음입니다. 그것은 물질적 삶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물질적 삶이 진정으로 풍요롭고 아름답게 될 수 있는 길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정의와 평화가 깃들 때 그 물질적 삶은 아름답게 되는 것입니다. 바알 숭배자들은 그 진실을 망각한 이들입니다.

오늘의 세계 가운데서도, 오늘 우리 사회에서도 그 관점의 대립은 여전히 반복되고 있습니다.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이 상황은 여전히 현재적인 문제입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누차 이야기했지요? 인류는 아직 성서 시대 제기한 문제 상황에서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이미 제기된 그 문제 상황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분투하는 과정이 역사의 진보적 과정을 이끌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새긴다면, 우리는 인간의 삶을 진정한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새삼 환기해야 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를 독단으로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사람들 가운데서 진정한 정의와 평화를 이루도록 인도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신실하게 따르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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