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특권 - 베드로전서 1:8~12[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8-06-24 13:57
조회
50
2018년 6월 24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특권
본문: 베드로전서 1:8~12



베드로전서는 이른바 박해서신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는 책입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로마사회에서 극심한 박해를 받고 있을 때, 그리스도교의 근본 도리가 무엇이며 그 근본 도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어떠한 삶의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인가를 일깨워 주며,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희망을 갖고 살아가라는 것이 책의 내용입니다. 이 서신은 박해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신앙을 지켜나갔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중요하지만, 더불어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초기 그리스도교 신앙의 한 원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도 흥미롭고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인사말(1~2절)에 이어, 시련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 있는 소망을 간직할 수 있는지 그 근거를 밝힌 다음(3~7), 그 의미를 집약하여 강조하고 있는 대목(8~12)입니다. 본문말씀은 매우 실제적이면서 동시에 매우 의미심장한 말씀으로 시련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사랑하며, 지금 그를 볼 수 없으면서도 믿으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영광과 즐거움을 바라보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믿음의 결과인 영혼의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8~9절)
이 말씀은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상황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과 도마가 만나는 장면 말미(20:29)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너는 나를 보았으므로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이 말씀은 흔히 의심 많은 도마를 질책하는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오해되고 있지만, 사실은 그런 것은 아닙니다. ‘나를 보고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러나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더 복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예수님과 삶을 함께 나눈 세대가 다 사라진 상황 가운데 기록된 복음서의 정황을 나타냅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포함하는 베드로전서는 그 기록연대가 그보다도 더 늦을 것으로 추정됩니다(96년 이후?). 확실히 예수님과 실제 삶을 나눈 세대가 사라진 상황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예수님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시련을 겪고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뜻, 그리고 그것이 인도하는 구원의 현실에 대한 믿음과 소망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시련을 겪고 있는 상황입니다. 당시 세대에 영합했으면 겪지 않을 시련을 겪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사랑하며, 지금 그를 볼 수 없으면서도 믿으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영광과 즐거움을 바라보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바로 그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격려하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단순한 격려의 선언, 축복의 선언이 아닙니다. 이 선언은 당시 그리스도인의 실존 그 자체를 확인해 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본 적도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흠모하고 그분의 사랑의 삶을 지금 살며, 마침내 그분이 실천했던 그 사랑의 삶이 인간을 구원한다는 것을 믿으며, 살아 있는 참 소망을 간직하는 가운데 기쁨을 누리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실존 그 자체에 대한 확언입니다.
1장 3절은 “하나님께서는 그 큰 자비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써, 우리에게 산 소망을 안겨주셨습니다.”라고 선포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산 소망’, 그것은 막연한 어떤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서 생생하게 살아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삶의 원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본 적도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믿으며 기쁨을 누리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것은 과거의 역사적 실제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보지 못했다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 말씀은 다가올 미래에 성취될 소망 역시 아직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이미 살고 있고 기쁨을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본문말씀은 그렇게 믿는 대로 구원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믿음의 결과인 영혼의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9절) 믿음으로 영혼의 구원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의 결과라는 말은 영혼의 구원이 일련의 과정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물론 여기서 ‘영혼’은 영육이원론을 전제로 한 개념이 아닙니다. 온전한 인격 전체를 나타내는 의미에서 ‘영혼’입니다. “사랑하며 믿으며 기쁨을 누리는 삶”의 여정 그것이 곧 구원에 이르는 삶입니다. 그 삶 밖에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온전한 인격으로 살아가는 삶의 여정 거기서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 구원이 갖는 의미를, 아주 흥미로운 말씀을 통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10~12).
그리스도인들이 누리게 될 구원은 오래 전 예언자들이 이미 통찰했던 것이라고 확인하고 있습니다. 예언자들이 ‘추구하고 연구하였다’고 했는데, 깊이 숙고하고 통찰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뒤에 올 영광을 미리 알려 주었다”고 합니다. 무슨 이야기일까요? 어떻게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살았던 예언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할 수 있으며,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당하실 고난과 영광을 예언자들이 미리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일까요? 아, 물론 믿음이 신실한(?)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기에(선재설) 가능하다고 믿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말씀을 그렇게 척척 아귀가 맞는 교리적 틀로 받아들이면 오히려 말씀의 진실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여기서 영은 그 누구에게 배타적으로 소유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지배했던 영적 통찰, 그리스도 사건을 깨닫게 만든 영적 통찰과 같은 영적 통찰이 예언자들에게도 공유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통찰로 깨달은 바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예언자들이 미리 안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이 무엇일까요? 이 말씀은 이사야서가 전하는 고난의 메시야(이사야 52:13~53:12)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마치 연한 순과 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싹과 같이 자라서,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2~5)
“고난을 당하고 난 뒤에, 그는 생명의 빛을 보고 만족할 것이다.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의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할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받아야 할 형벌을 자기가 짊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가 존귀한 자들과 함께 자기 몫을 차지하게 하며, 강한 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하겠다. 그는 죽는 데까지 자기의 영혼을 서슴없이 내맡기고, 남들이 죄인처럼 여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졌고, 죄 지은 사람들을 살리려고 중재에 나선 것이다.”(11~12)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하지만, 구약성서에서 가장 위대한 통찰 가운데 하나가 고난의 메시야에 관한 통찰입니다. 메시야, 곧 구세주에 대한 갈망은 성서의 세계에서 중요한 기둥을 이루고 있습니다. 처음 메시야에 대한 갈망에서 그 전형은 다윗 왕과 같은 메시야였습니다. 모든 문제를 일괄타결, 전적으로 해결해주는 위대한 왕으로서 메시야입니다. 그런데 구약성서 시대 후반으로 가면서 새로운 메시야상이 등장합니다. 고난의 종으로서 메시야상입니다. 위대한 왕과 같은 면모와는 반대되는, 속된 말로 하면 ‘찌질한’ 메시야라고 할까요? 이사야서가 전하는 고난의 종입니다. 그 통찰이 갖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고난받는 민중들의 스스로의 자각을 함축합니다. 희망이 외부로부터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겪고 있는 자신들 가운데서 일어날 때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희망이라는 통찰입니다.
초기 기독교시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 것이 어디에 근거하고 있을까요? 두 말 할 것 없이 고난받는 메시야상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온전히 사랑의 삶을 살았던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극한의 고통을 겪고 죽음에 이르렀던 사건의 의미를 묻고 물었던 데서 그리스도교 신앙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사건의 의미는 옛 예언자들이 이미 선포한 말씀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바로 이 진실입니다. 베드로전서의 청중들은, 지금 자신들이 겪고 있는 고난을 통해서 그 진실을 더욱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고난을 겪었지만, 그저 무참히 죽음에 갇히지 않고, 그 죽음을 야기시킨 세상의 악한 세력을 폭로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 진실을 깨달음으로써 일어서게 만들었습니다. 그 사건의 의미를 받아들인 당대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 믿음으로 지금 자신들이 겪고 있는 고난 또한 이겨낼 희망을 가졌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마지막 대목 또한 흥미로운 표현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이 일들은 이제 하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성령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한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이 일들은 천사들도 보고 싶어 합니다.”
앞서 말한 그리스도 사건의 진실을 선포하는 것이 곧 복음이며, 그 복음은 사도들에 의해 선포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표현은, 그 복음이 선포되고, 그렇게 선포된 복음을 믿음으로써 누리게 되는 구원의 사건을 “천사들도 보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바꿔 말하면 ‘천사들도 보고 싶어 하지만 아직 보지 못한 것을 여러분은 보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천사들에게도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낯선 관념이겠지만, 당시 사람들에게 천사는 일종의 중개자로 간주되었던 통념을 통해 이 말씀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특별한 중개자 없이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 사건, 곧 그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갖는 의미를 알고 있고, 그 의미를 깨우치고 받아들임으로써 구원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는 이야기가 됩니다.
박해를 받는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지키며 사랑을 나누는 삶을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특권을 이야기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직접 보지도 않았고, 또 특별한 어떤 천상의 존재에 의한 매개도 없이 그리스도 사건의 진실을 알고, 그 진실을 아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격려를, 오늘 말씀은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단지 초기 그리스도인, 그것도 박해를 극심하게 겪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만 해당할까요? 만일 우리들이 그리스도 사건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그렇게 제대로 알고 있는 만큼 진정으로 사랑을 나누는 삶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면,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갖는 의미를 오늘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깨닫고 그 깨달은 바 의미를 우리의 삶으로 구현해나가고 있다면 우리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누렸던 그 특권을 누리고 있는 셈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사건을 과거의 한 때 사건으로 알고, 그것을 단지 믿는 믿음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의 삶 가운데서 그 의미를 발견하고 깨닫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예멘의 난민들이 제주도에 몰려드는 것을 보고 그들에 대해 혐오하는 가짜 뉴스가 난무하고 그들을 제지해달라는 청원을 올리는 사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한편의 사람들은 그들을 보호하는 자원봉사자로 나서는가 하면 정부가 신속히 인도적 조처를 취해야 한다고 청원을 올리고 있습니다. 어느 편이 그리스도 사건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그 의미를 자신의 삶으로 실현하는 사람일까요? 신앙의 이름으로 이교도들을 배척해야 한다는 사람들일까요 신앙의 이름으로 그들을 돌봐야 한다는 사람들일까요?

오늘은 특별히 한국전쟁을 되새기고 민족화해를 염원하는 주일이기도 합니다. 때마침 민족화해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화해는 좋지만, 이민족이 우리의 삶을 불편하게 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면 되겠습니까? 그 난민들의 얼굴 가운데서 우리의 얼굴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교의 믿음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사건이 지닌 보편적 구원의 의미를 받아들이는 믿음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특권은 남들보다 우위에 서는 특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특권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모든 사람을 섬기고 받아들이는 특권입니다. 그것으로 평화를 이루고, 기뻐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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