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넘어 앞서가시는 성령의 역사 - 사도행전 8:26~39[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8-07-08 13:44
조회
136
2018년 7월 8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경계를 넘어 앞서가시는 성령의 역사
본문: 사도행전 8:26~39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흥미로운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에티오피아의 내시, 정확하게 말해 에티오피아 궁정에서 재정을 맡고 있는 고위관료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를 알려 주는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유대의 경계를 넘어 이방세계로 전파되었는지, 그렇게 경계를 넘어 전파될 수 있었던 동인이 무엇이었는지 알려주는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다시 환기하면 이렇습니다.

사도들부터 안수를 받은 일곱 집사 가운데 한 사람인 빌립(6:2~6)이 성령의 인도를 따라 예루살렘 남쪽 가사로 향합니다. 오늘날 팔레스타인의 자치구인 가자 지역을 말합니다. 빌립은 예루살렘에 예배를 드리러 왔다가 본국으로 돌아가는 에티오피아의 고관을 만납니다.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재무대신이 되는 사람입니다. 간다게는 사실 고유명사가 아니고 파라오와 마찬가지로 왕을 뜻하는 말입니다. 에티오피아 여왕의 재무대신이 그 주인공입니다.

그는 돌아가는 길에 마차에서 이사야서를 읽고 있었습니다. 성령께서는 빌립에게 그 마차에 바짝 다가가도록 명합니다. 그 사람이 이사야서를 읽고 있는 것을 듣고 빌립은 말을 겁니다. “지금 읽으시는 것을 이해하십니까?” 에티오피아의 고관은 그렇잖아도 기다렸다는 듯이 답합니다. “나를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내가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며 빌립더러 자기 마차에 타라고 권하였습니다. 모든 상황이 예비된 듯이 척척 맞아 돌아갑니다. 빌립은 에티오피아 고관의 마차에 올라타 그가 마침 읽고 있던 이사야서의 본문을 두고 이야기합니다. 그 본문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사야서 53:7~8이었습니다. 이른바 고난 받는 종에 관한 내용입니다.

에티오피아의 고관은 묻습니다. 그 내용이 예언자 자신을 두고 한 말인지 아니면 다른 누구를 두고 한 말인지 묻습니다. 빌립은 무릎을 쳤겠지요?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하는 말씀이라는 것을 설파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한 바로 그런 분이 우리와 함께 사셨다는 것을 말했을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를 알리는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고 간단하게 언급되어 있지만, 빌립은 신이 나서 말씀의 의미를 해석하고 그 말씀에 부합하는 존재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하였을 것입니다. 두 주 전에도 우리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어떤 메시야로 받아들였는지 확인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재삼 확인되고 있습니다.

애초부터 진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는 진지한 사람이었던 에티오피아의 고관은 곧바로 회심을 하고, 물이 발견되는 곳에 이르자마자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에게 세례를 베풀자 성령께서 빌립을 또 다른 길로 인도하였다고, 본문은 마감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초대교회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을 전하는 매우 의미심장한 이야기의 문맥에서 한 일화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전체적인 문맥을 보면 이 이야기가 매우 의미심장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그 나름의 고유한 역사관을 갖고 있고, 그에 따라 적절하게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스데반과 함께 빌립이 집사로 뽑힌 이후 사도행전의 이야기(6장 이하)를 보면 오늘 본문말씀의 의미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스데반의 순교 이야기입니다. 스데반은 유대의 전통에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설파하는 명설교를 하였지만 예루살렘 주민은 그의 설교를 거부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예루살렘 주민에 의해 순교를 당합니다. 이 이야기는 유대인들의 완고함을 말해줍니다. 자신들만이 정통성을 지니고 있고, 따라서 자신들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배타적 믿음에서 벗어나지 못한 유대인들의 상황을 말합니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하였을 때 사마리아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곧바로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정통 유대인들이 상종 못할 원수로 여겼던 사마리아인들이 오히려 구원의 현실에 가까이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사도행전은 이를 성령께서 하시는 일로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다른 말로 성령행전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마리아 지역에서는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등장합니다. 사마리아 지역에서 빌립이 활약을 하니 사도 베드로와 요한도 잇달아 나타나 열성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들이 성령의 인도함으로 놀라운 일들을 펼치자 마술사 시몬이라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능력을 돈으로 사고자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그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돈으로 사려고 생각하였으니, 그대는 돈과 함께 망할 것이오.”라고 저주를 내립니다. 이 이야기는 현실을 지탱해주는 엄연한 법칙을 넘어서는 성령의 능력, 곧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을 말합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이야기가 바로 오늘 본문 이야기입니다. 이방 왕국인 에티오피아 고관이 회심한 내용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중심의 지리적 세계관에 의하면 에티오피아는 이방일 뿐 아니라 남쪽 땅 끝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특정한 경계를 넘어 땅 끝에 이르기까지 확장되고 있는 사실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 다음에 이어지는 사도행전의 내용은, 사도 바울의 회심 이야기, 그리고 베드로가 비로소 이방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이방선교가 개시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말씀은, 베드로에 의한 이방선교가 펼쳐지기 이전에, 또한 베드로에 의해 이뤄진 이방선교가 사도들에 의해 교회에서 공인되기(사도 11: 18) 이전에, 그 모든 일에 앞서 성령에 의해 이뤄진 사건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령의 역사로 그리스도의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이 우리 인간에게 의미하는 바 그 뜻을 받아들이고 구원의 대열에 동참한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한 과정을 전하는 문맥에 위치한 오늘 본문말씀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선 스스로 잘 났고 의롭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보다도 더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의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전해 주고 있고 그를 통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과연 이 에티오피아 궁정의 고관이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본문에 기록된 것으로 볼 때 모호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루살렘에 예배를 드리러 갔고 이미 성경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보면 혹 유대인이 아니었을까 추정해볼 수도 있기는 합니다. 전설상으로 에티오피아의 왕조가 솔로몬 왕과 에티오피아의 시바 여왕 사이에서 태어난 후예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날도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스스로 그 후예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혹 그 궁정의 고관이 그런 의미에서 유대인이 아니었을까 상상해봄 직합니다.

그러나 당대의 정통 유대인들의 통념에 비추어볼 때, 그리고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가 이 일을 이례적인 사건으로 전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이른바 정통 유대인의 관점에서 그는 기준에 부합할 수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그들과 인접한 사마리아인들을 대한 태도를 생각하면 에티오피아인은 더욱 낯선 존재였을 것입니다. 그는 땅끝 나라에서 온 이방인이었고, 게다가 내시였습니다. 내시가 궁정의 관료를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지만, 통념상 내시는 거세당한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방인으로서 거세당한 사람은 절대로 정통 유대인의 기준에 부합할 수 없는 조건에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에 들어올 자격이 없습니다. (신명 23:1~2). 오늘 본문 이야기는 이 통념을 전제로 하고 볼 때,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마침 이 주인공이 이사야서를 읽고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이사야서는 이런 말씀을 전하기도 합니다. “비록 고자라 하더라도, 나의 안식일을 지키고, 나를 기쁘게 하는 일을 하고, 나의 언약을 철저히 지키면, 그들의 이름이 나의 성전과 나의 백성 사이에서 영원히 기억되도록 하겠다.”(이사 56:4) 사도행전의 이 이야기는 마침내 그 일이 실현되었다는 것을 전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로써 이 이야기는, 스스로 속해 있는 집단의 정체성을 자신의 삶의 모든 조건으로 알고 그 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의 상식적인 삶의 방식과 통념을 뛰어넘어서는 구원의 역사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스스로 의롭다 믿는 사람들이 확고부동하게 쳐 놓은 경계를 넘어선 하나님의 역사, 성령의 역사를 전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서의 신앙세계가 깊어지면서 그 메시지는 점점 뚜렷해집니다. 사람들이 스스로로 특정한 경계 안에 자신들을 가두고 그 안에서 자기 의를 내세우며 모든 것을 판단할 때, 하나님의 영은 언제나 그 경계를 훌쩍 넘어 앞서 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진실을 깨닫는다면 겸허해지는 것이 마땅합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성령의 능력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과연 어떤 삶의 태도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의 뒤편에 이어지는 베드로의 이야기는 인상적입니다. 베드로가 이방선교에 나서기 전 베드로는 하나의 환상을 봅니다. 하늘에서 온갖 생물들이 들어 있는 바구니가 내려오는데, 유대인의 전통 에서는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생물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걸 다 다 받아먹으라는 음성이 들립니다. 베드로는 부정한 것을 먹은 적이 없다고 고백하지만, 하늘에서는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라”는 음성이 들립니다.

자신의 전통과 소속, 자신의 편견과 아집으로 진실을 재단하는 과오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갇혀 있던 자기세계에서 나아가 진실로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있는 길, 진실로 모든 사람이 평화롭게 구원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는 길로 나아가라는 이야기입니다.

 

성서가 이렇게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는데, 도대체 어쩌자고 우리 사회에서 혐오와 배제의 논리를 외치는 사람들의 중심에 기독교인이 자리하게 되었을까요? 어쩌자고 인권조례를 반대하고, 난민을 반대하고, 소수자를 배척할까요? 그 신앙의 실체가 도대체 뭘까요? 그것이 성서의 가르침에 부합할까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쳐 놓은 경계를 넘어서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펼칩니다.

방송으로도 잘 알려진 뇌과학자에 의하면, 인간 두뇌의 창조성이 발현되는 순간은 평소 신호 주고받지 않고 거리가 멀었던 부위간의 신호를 주고받는 때라고 합니다. 창의력의 실체는 굉장히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서로 연결하는 능력이라고 합니다. 낯선 사람 낯선 세계를 접할 때 인간의 창의력이 더욱 증대된다는 견해도 덧붙이고 있습니다(정재승, <열두 발자국>). 성령께서 앞서 가면서 구원하는 능력을 이해하는 데 하나의 은유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성서의 말씀을 제대로 따르고자 한다면, 우리의 한계와 우리의 기준을 넘어서는 성령의 역사를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다가온 낯선 사람들을 열린 팔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그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믿고 따를 때 우리 사회는 훨씬 풍요롭고 평화롭게 될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나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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