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진실 앞에 선 삶의 무게 - 예레미야 1:4~10[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8-07-29 14:35
조회
91
2018년 7월 29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말씀의 진실 앞에 선 삶의 무게
본문: 예레미야 1:4~10



(* 여러분의 배려로 교토 일정을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무더운 날씨에 설교와 강연, 그리고 만나야 할 여러 사람들과의 약속이 이어졌고, 속칭 ‘노가다’ 같은 일도 하고 온 터라 또 하나의 일상생활의 연장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적어도 이곳에서 불쑥불쑥 끼어드는 일은 없었으니 휴가인 것 또한 사실입니다.^^ 건강하게 일정을 마치고 돌아와 여러분을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구약성서에는 대예언자로 불리는 세 사람이 있습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이 그 예언자들입니다. 방대한 예언서 기록을 남겼고, 그런 만큼 그 활동의 족적이 뚜렷한 세 예언자입니다. 비단 이 세 예언자들뿐 아니라 어떤 예언자의 메시지도 소홀히 될 수 없지만, 예언자들 가운데서 가장 인상적인 예언자를 꼽는다면 아마 예레미야일 것입니다.
특별히 세 예언자들만 두고 말한다면, 이사야는 현란한 신학적 거장의 면모를 지니고 있고, 에스겔은 강렬한 희망의 선포로 두드러진 특징을 지니고 있다면, 예레미야는 스스로 가장 극적인 고난의 삶을 살았고 그 메시지 또한 한 없이 깊은 의미를 갖는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입으로 외친 선포 이전에 고난의 삶 자체가 이미 무거운 메시지라고 할 만큼 극적인 삶을 살았던 예언자였습니다. 아마도 혼탁한 세상, 역사의 격랑기(유다왕국의 멸망에 이르기까지)에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자 한 인간의 내면세계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가장 뚜렷하게 보여 주고 있는 예언자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예언자 예레미야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는 상황을 전하는 본문입니다. 소위 예언자의 소명기사입니다. 모든 예언서들에는 그 첫머리에 소명기사가 나옵니다. 그것은 카리스마적 지도자로서 예언자들의 특성을 잘 드러내줍니다. 정치 지도자로서 왕이나 종교 지도자로서 제사장이 세습으로 그 역할을 이어받는 것과는 달리 예언자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부름으로 역할을 부여받습니다. 예언자들은 전적으로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지도자입니다. 그러기에 예언자들은 그 출신이 다양합니다. 귀족, 제사장, 농부, 목자 등 다양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주인공 예레미야는 지배계층에서 배제된 제사장 가문 출신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가 소명을 받는 장면입니다. 크게 세 단락으로 구성된 말씀을 다시 환기하자면 이렇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부르는 장면입니다. “내가 너를 모태에서 짓기도 전에 너를 선택하고,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너를 거룩하게 구별해서, 뭇민족에게 보낼 예언자로 세웠다.”
“태어나기도 전에” 예언자로 세웠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예언자로서의 운명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그렇게 깊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어떤 정황을 헤아려 보자면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부여된 어떤 조건을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서의 첫머리는 예레미야가 “베냐민 땅 아나돗 마을의 제사장 출신인 힐기야의 아들”이라고 소개합니다. 여기에 예레미야가 태어나기 전부터 부여된 운명적 조건이 있습니다. 아나돗은 솔로몬 왕 때 파면당한 제사장 아비아달이 추방당한 곳입니다. 솔로몬 왕은 훗날 사두개파의 조상으로 알려진 사독을 아비아달 대신 제사장으로 임명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나돗은 권력으로부터 배제당한 곳입니다. 그 아비아달 제사장의 후손으로서 예레미야는 권력으로부터 배제된 자신의 가문과 그 땅의 기풍을 체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역할을 맡고 있지만, 예언은 항상 당시의 역사적 상황, 그리고 예언자 자신의 경험과 인격을 매개로 하고 있습니다. 아나돗의 몰락한 제사장 가문 출신으로서 예레미야는 자신의 인격을 형성하는 데 조상들이 처했던 그 상황으로부터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예언자로 세웠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그렇게 깊다는 것을 말하지만, 한편으로는 예언자 자신이 자각하기 이전의 역사적 유산이 그 자신에게 계승되고 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오늘의 자신의 삶이 있기까지 역사의 무게, 그 역사의 무게감을 받아들인 삶의 무게를 함축합니다. 지금 예언자로 소명을 받는 예레미야는 기존의 체제에 대한 저항의 역사 앞에서 부름을 받고 있으며, 그 역사의 무게감을 스스로의 삶의 무게로 감당할 것을 요청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예레미야는 선뜻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아닙니다. 주 나의 하나님, 저는 말을 잘 할 줄 모릅니다. 저는 아직 너무나 어립니다.”
언뜻 보기에 의외의 대답입니다. 그런데 이 대답의 태도에 예언자의 어떤 전형이 드러납니다. 이사야나 에스겔과 같은 경우에는 하나님의 소명을 선뜻 받아들이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예레미야는 선뜻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것은 마치 모세의 태도를 연상시킵니다. 모세가 어땠습니까? 이집트에서 억압받는 백성을 해방시키라는 하나님의 소명 앞에서 말이 어눌해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없다고 답합니다. 그 때 하나님은 말 잘하는 그의 형 아론을 대변인으로 내세웁니다. 하나님께서 해결책을 제시해주니 더 이상 발뺌하지 못하고 모세는 마침내 그 소명을 받아들입니다.
예레미야는 어떻습니까? 말도 못하고 어리기 때문에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어리다는 것은 단지 나이가 어리다는 의미이기보다는 어리석다는 의미로 새기는 것이 적절합니다. 참 이상한 장면입니다. 예언자는 점쟁이가 아니라 대변인을 뜻하는데, 대변인이라면 당연히 말 잘하는 사람이 맡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대변인으로 부름 받은 사람이 말을 못한다고 고백하고 있는 상황은 확실히 의외의 사태입니다.
모세에게서, 그리고 예레미야에게서 나타난 이 현상은 사실 예수님에게서도 나타납니다. 물론 우리가 갖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인상은 항상 확신에 차 있는 이미지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예상하고 “잔을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게 해 달라”고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위대한 인물들의 일관된 태도에서 중요한 진실을 확인합니다. 겸손, 겸양? 그렇게 이해해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역사 앞에서 스스로의 한계를 자각하며 끊임없이 자기성찰을 하고 있는 진정한 위인의 모습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감당하고자 하는 일이 어떤 일인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취할 수밖에 없는 태도입니다. 물론 선뜻 응한 예언자들은 뭘 모르는 사람들이냐 하면 꼭 그렇지는 않고 그 나름의 정황이 있다고 봐야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예언자 예레미야처럼 이렇게 마치 발뺌을 하고자 하는 것처럼 보이는 태도는, ‘내가 감히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끊임없이 자기 자신의 능력과 한계를 점검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의 역사적 무게감을 확실하게 느끼고 있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정말 큰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이러한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께서는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언제나 함께 하며 해야 할 말을 일러 주시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맡긴다. 똑똑히 보아라. 오늘 내가 뭇 민족과 나라들 위에 너를 세우고, 네가 그것들을 뽑으며 허물며, 멸망시키며 파괴하며, 세우며 심게 하겠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아예 당신의 말을 예언자의 입에 맡기고 계십니다. 어떻든 예언자는 하나님을 대변해서 선포하는 역할을 맡고 있지만, 아예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을 예언자의 입에 넣어 준다는 표현은, 이 예언자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태도, 하나님의 진실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의 태도를 가장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말 잘하는 사람들이 온갖 말재주로 현란한 말들을 꾸미고 선포하는 것과 전혀 차원이 다른 태도를 말합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진실을 전하고자 하는 예언자의 태도를 말합니다. 말의 위력이 어디에 있는지 일깨주는 말씀입니다. 말의 힘은 그 현란함에 있지 않고 진실을 드러내는 데 있음을 일깨주는 말씀입니다. 그의 입을 통해 선포된 말을 통해 진실과 오류를 분별할 수 있게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온갖 기인행각으로도 유명한 예언자입니다. 그는 말로써만이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표했습니다. 어눌한 말솜씨를 기인행각으로 보완한 것은 아닙니다. 삶으로 진실을 드러내는 그의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어눌하다고 고백했던 것과 달리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말씀들을 선포했습니다. 때로는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나요?” 절규하기도 했지만, 정말 사람들이 마음에 새겨야 할 새 언약의 말씀을 선포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이 예언자의 소명체험이 도대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저는 늘 마음속으로 새기지만, 설교의 가장 첫 번째 청자는 바로 설교자 자신이라 생각합니다. 설교자가 말씀의 의미를 깨우치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다른 청중들에게 선포할 수 있을까요? 바로 그 점에서 오늘 말씀은 설교자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으로, 저는 겸허히 받아들입니다.

다음으로 수없이 현란한 말들과 외면의 가식적인 태도로 자신을 드러내야만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오늘의 삶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해주는 비수와도 같은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우리의 일상의 삶이 그렇거니와, 사람들의 일상적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정치의 현실은 더욱 그렇습니다.
지난 주간 이 땅의 민주주의를 바라는 많은 사람들은 진보정치의 표상이 되어 온 노회찬 의원의 죽음을 안타까워했고, 더불어 비통해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비통해하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현실의 많은 정치인들과 달리 진실을 무기삼은 보기 드문 정치인으로서 그의 발걸음이 중단된 사실, 그가 내면 깊이에서 느꼈을 좌절감에 공감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혹 정치인으로서 그의 말이 현란하였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결코 겉으로 꾸미기를 좋아하는 현란함과는 상관없었습니다. 오히려 다소 어눌한 듯하지만, 촌철살인, 짧은 말 한마디마다 모든 사람이 공감하는 진실의 정곡을 찌르는 것이 정치인으로서 그의 어법의 특징이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살아온 삶과 정치역정에서 비롯되는 특기였습니다. 마지막 남긴 말, 곧 “반올림... 그리고 KTX 노동자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전합니다.”라는 말이 말해주듯, 그는 우리 사회 약자들을 마음으로부터 대변하는 보기 드문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그의 말에 공감하고 그의 목소리에 힘을 얻었습니다.
그런 그였기에, 기득권자들에게만 유리한 정치자금법의 올무에 매여 어쩔 수 없이 ‘범법자’가 되어버린 현실에서 그는 바늘구멍만한 내면의 균열을 견딜 수 없어 스스로 죽음에 이르는 길을 택하고 말았습니다. 비록 기울어진 마당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민주주의의 진전을 위한 모두의 발걸음에 자신이 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비통한 마음으로 그 길을 선택하였을 것입니다. 삶을 가벼이 여겼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삶을 무겁게 여겼기 때문에 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지난 주간 JTBC 손석희 앵커는, 미국의 사회운동가 파커 J. 파머의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 왜 민주주의에서 마음이 중요한가>를 인용하며 그의 죽음의 의미를 새겼습니다. 정치를 전략과 전술, 또는 공학적 차원에서 그 기능과 효과만을 생각하는 풍토에서 전혀 다른 시각을 보여주고 있는 저술입니다.
“비통한 자들, 즉 마음이 부서진 자들에 의해 민주주의는 진보한다”; “진보는 현상유지에 안주하지 않으려는 사람들, 마음이 무너진 사람들의 동요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았다”; “민주주의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무엇이 아니라 우리가 하고 있는 무엇이다.”
이상은 손석희 앵커가 인용한 대목들이지만, 파커 J. 파머는 그 책의 맨 앞 페이지 헌정사에서 무고하게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명기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정치라는 것이 모든 사람을 위한 연민과 정의의 직물을 짜는 것이라는 점을 잊어버릴 때, 우리 가운데 가장 취약한 이들이 맨 먼저 고통을 받는다. 어린이, 노인, 정신질환자, 가난한 사람 그리고 노숙인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이 고통을 겪을 때 우리 민주주의의 성실성도 고통을 겪는다.”
한 정치인의 죽음을 비통해하는 것은, 그 마음을 알고 그 마음을 가진 보기드문 한 정치인과 공감했던 모든 사람들의 마음 때문일 것입니다. 삶을 진실로 무겁게 받아들인 모든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아니, 이 사건을 계기로 저마다의 삶을 진실로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각오를 새롭게 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름과 진실 앞에 떨리는 마음으로 임했던 예언자의 모습은,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삶의 태도를 그렇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진실을 외면해야만 잘 살 수 있는 삶의 현실이기에, ‘하나님, 하나님을 믿는 삶이 그것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라면 그 길에서 도망가고 싶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싶은 것이 우리의 솔직한 심정이지만, 그래도 진실된 삶을 살겠다고, 그 진실 앞에 자신을 내 맡기겠다고, 내 삶을 결코 가벼이 여기지 않겠다고 다시금 다짐하도록, 오늘 말씀은 우리를 일깨웁니다.
그 말씀의 진실을 마음 깊이 새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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