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흘린 땀의 열매를 누리는 기쁨 - 이사야 62:6~12[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8-08-05 15:13
조회
54
018년 8월 5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내가 흘린 땀의 열매를 누리는 기쁨
본문: 이사야 62:6~12



오늘 우리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함께 읽었습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예언자 이사야는 예레미야, 에스겔과 함께 성서의 대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말씀은 바빌론 포로 생활이 끝나가고 해방의 서광이 비쳐오는 현실에서 예언자 이사야가 희망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이른바 세 번째 이사야서의 한 대목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앞부분은 하나님의 약속은 기필코 이뤄질 것이므로 파수꾼들은 그 약속이 이뤄지는 상황을 눈여겨 지켜볼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파수꾼이 그냥 지켜보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하신 약속을 늘 주께 상기시켜 드려야 할 너희는,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 늘 상기시켜 드려야 한다.” 파수꾼은 그저 기다리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장차 이뤄지길 바라는 그 희망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존재로서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더더욱 재미있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주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실 때까지 쉬시지 못하게 해야 한다.” 하나님을 귀찮게 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안 들어 주신다는 것일까요? 그 만큼 절절하게 희망을 이루기 위해 애쓰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 본문말씀은 하나님께서 장차 이루실 일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선포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내가 다시는 네 곡식을 네 원수들의 식량으로 내주지 않겠다. 다시는 네가 수고하여 얻은 포도주를 이방 사람들이 마시도록 내 주지 않겠다.’ 곡식을 거둔 사람이, 곡식을 빼앗기지 않고 자기가 거둔 것을 먹고, 주님을 찬송할 것이다. ‘거둔 사람이 자기가 거둔 것을 내 성소 뜰에서 마실 것이다.’”
이 말씀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우선 이 말씀은, 유대 백성이 겪었던 현실을 그대로 환기하고 있습니다. 유대 백성은 바빌론제국에 나라를 멸망당하고, 그 지도자들이 포로로 붙잡혀 갔고, 당연히 그들이 땀 흘려 거둔 소출을 이방의 제국에 빼앗겼습니다. 이 말씀은 바로 그 현실을 환기시키며, 다시 회복될 예루살렘에서는 더 이상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잘 음미해보시기 바랍니다. 자기가 땀 흘려 거둔 것을 남에게 빼앗기지 않고 자기 스스로 누린다는 이 선포는 모든 사람들의 평범한 소망을 말하는 것이자 동시에 정의의 핵심적 요체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정의의 핵심적 요체가 무엇일까요? 누구에게나, 각자에게 정당한 몫이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정의의 요체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초점은 내가 거둔 것이니 내 마음대로 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이 그 누군가 다른 사람이나 세력으로부터 침해당하거나 지배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의를 깨트리는 것은 지배와 억압, 그리고 수탈입니다. 바로 그 현실에서 예언자는 이제 누구에게 정당한 몫이 돌아가고 누구나 자기 땀의 결과를 누리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라 선포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서는 누구에게나 정당한 몫이 돌아가야 한다는 정의의 원칙 말고도, 이를 보완하는, 아니 오히려 더 근본적인 정의의 원칙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나 마땅히 자기 삶을 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능력과 공로에 상관없이 자기 삶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정의의 근본적 원칙입니다. 사회적 약자를 돌봄으로써 정의를 이뤄야 한다는 성서의 선포는 그 원칙을 말하고 있습니다.
각자에게 정당한 몫이 돌아가게 하는 것만으로도, 그것마저도 이뤄지지 않은 현실에서 정의를 이루는 중요한 원칙이 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각자의 정당한 몫이라는 것이 어떤 능력이나 기여도에 따른 것이라면, 소위 무능력자와 약자는 그 원칙에서 배제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서는 능력에 상관없이 누구나 자기 삶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은 그들이 무능력하고 약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사회적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개인의 차원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말씀도 사실은 그 정신을 밑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자기가 흘린 땀의 결과를 누리지 못한다는 것이 어떤 현실일까요? 그것은 그저 억울한 상태에 처해 있다는 것뿐 아니라 나아가 자기 삶을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말합니다. 생존 자체가 위협을 겪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타의에 의해 땀의 결과를 빼앗기고 결국 자기 삶 자체를 빼앗긴 현실에서, 자기가 흘린 땀의 결과를 빼앗기지 않음으로써 자기 삶을 누리게 될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바로 그 소망이 이뤄질 때 비로소 사람들은 하나님을 온전히 찬양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곡식을 거둔 사람이, 곡식을 빼앗기지 않고 자기가 거둔 것을 먹고, 주님을 찬송할 것이다. 거둔 사람이 자기가 거둔 것을 내 성소 뜰에서 마실 것이다.”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탄식하지 않고 저마다 삶의 기쁨을 만끽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리라는 간절한 희망입니다.
예언자는 그 희망을 향한 길을 넓히고, 그 희망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도록 촉구합니다. 그 넓혀진 길을 통해 구원자가 포로로 잡혀갔던 백성들을 데리고 오고, 마침내 그 백성들의 고향이 ‘하나님께서 사랑한 도성’, ‘하나님께서 버리지 않은 도성’이라 불리게 될 것이라 선포하고 있습니다. 궁극적인 하나님 나라를 향한 열망을, 예언자는 일찍이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미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예언자 이사야의 이 선포는 유대 민족이 바빌론에 의해 나라가 멸망당한 후 포로로 붙잡혀가 있던 시절 막바지에 선포되었습니다. 해방의 희망을 선포한 것입니다.
본문말씀이 전하는 상황과 가장 가까운 범례를 우리 역사에서 찾는다면 역시 일제에 의한 식민지배의 상황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때마침 다음 주일은 평화통일주일로서, 본래는 8.15 해방을 기념하는 때이지만 해방과 동시에 분단이 된 역사적 현실을 기억하여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을 담아 기념하는 주일로 삼은 것입니다. 일제로부터 침략을 당해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역사를 주체적으로 극복하지 못한 역사적 현실을 직시하며 평화통일의 역사를 이루기 위한 뜻을 모으는 주일입니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 현실을 기억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 시대의 역사를 전반적으로 재구성하여 기억하는 방식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 이전에 일제시대를 직접 경험하지 못한 세대로서 나름대로 기억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그 시대를 직접 경험한 부모님들의 이야기를 통해 기억하는 방식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부모님들로부터 들었던 일제 강점기 경험과 관련된 이야기 가운데 가장 많이 들었던 것은 ‘징용’과 ‘공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징용은 사람을 강제로 동원하는 것을 말합니다. 군역으로, 노역으로 동원한 경우를 말합니다. ‘위안부’로 동원된 것도 이에 해당할 것입니다. 공출은 주로 물자를 동원하는 경우를 말하지만, 사실은 물자뿐만 아니라 사람을 동원하는 경우에도 사용된 말입니다. 아버지는 징용을 피하기 위해 여기저기 피신하셨고, 어머니는 정신대로 끌려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일찍 결혼하셨다는 이야기를 귀에 박히도록 들었습니다. 전쟁말기 극에 달한 공출에 관한 이야기도 역시 귀에 박히도록 들었습니다. 숟가락 젓가락을 물론 온갖 그릇들을 다 공출 당했고, 먹어야 할 쌀마저 공출 당했다는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습니다. 공출을 피하기 위해 이중벽을 만들고 벽 사이에 쌀을 감춰뒀는데 그것마저 빼앗겼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당시 민중들이 일제의 횡포를 가장 직접적으로 겪은 경험을 압축한 핵심일 것입니다. 부모님들부터 들은 그 이야기는 일제 강점기를 평가할 때 언제나 기억에 남아 있는 일종의 핵심어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적으로 식민지배의 가장 극명한 본질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식민지배는 단적으로 인간의 주체적 삶을 부정한다는 데 그 본질이 있습니다. 사람들 스스로가 자신의 삶을 결정할 수 있도록 보장하지 않고 통치세력이 폭력으로 사람들의 운명을 결정해버릴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의 생명을 영위하기 위해 땀을 흘려 거둔 소출마저 빼앗아가 버리는 사태를 이민족의 통치세력과 국가권력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것이 식민지배의 본질입니다.
본문말씀에서 예언자 이사야가 선포하고 있는 간절한 희망의 메시지는 바로 그 우리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제야 그 제국주의 시대 유산을 극복할 수 있는 역사의 대장정에서 겨우 첫 걸음을 떼고 있는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 최근 밝혀진 바로는 과거 정부 시절 사법농단의 여러 사례 가운데 하나로, 일제 당시 징용당한 사람들의 개인 청구권마저 가로 막으려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정말 촛불혁명이 성공하지 않았더라면 이 나라가 어찌 되었을까요? 소름이 돋고 오싹해질 지경입니다.

자기 땅에서 자기가 흘린 땀의 열매를 누리는 일은, 이민족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것으로만 충족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희망은 우리의 일상의 삶에서 또한 간절합니다.
“노동은 노동자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을 통해 자기 자신을 긍정하지 않고 부정하며, 행복을 느끼지 않고 불행을 느끼며, 자유로운 신체적 정신적 에너지를 개발하지 못하고, 자신의 신체를 채찍질하고 자신의 정신을 황폐화한다. 따라서 노동자는 노동 바깥에 있을 때 비로소 안도감을 느끼며 노동을 할 때에는 탈아감을 느낀다.”(칼 맑스 <경제학 철학 수고>)
어떻습니까? 여기 계신 여러분들은 저마다 일터에서 일할 때 어떤 느낌입니까? 지금 들려드린 이야기는 칼 맑스의 이야기로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의 성격을 예리하게 통찰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소외된 노동, 노동의 소외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노동이 자기를 실현하는 것과 상관없이 소외되어 있는 현실입니다. 그러니까 노동을 하면 할수록 자기가 원하는 삶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멀어지는 현실입니다. 그러니 일터에서 벗어났을 때야 비로소 안도감을 느끼고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아차리는 상황입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차별, 성별격차, 뿐만 아니라 각종 출신과 등급에 따라 노동이 분절화되어 있는 한국사회에서 그 소외는 더욱 극심합니다.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 현 정부가 지향하는 바이지만, 그 성과는 아직 불투명합니다. 그러기에 자기 땅에서 자기가 흘린 땀의 열매를 누리고자 하는 희망은 지금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 모두에게 여전히 간절한 희망입니다.

직장에서, 일터에서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생활세계의 식민화’, 위르겐 하버마스가 통찰하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 세계의 일상적 모습입니다. 거대한 자본과 권력으로 뒷받침되는 체계에 의해 일상적 생활세계 자체가 포획당한 형국을 말하는 것입니다. 돈과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공간, 그런 것과 상관없이 나만의 삶을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여지가 사라져버린 현실을 말합니다. 직접적인 물질적 수탈만이 문제가 아니라 삶 자체가 옮짝달삭할 수 없게끔 되어버린 현실입니다.
바로 그 삶의 현실에서, 자기 땅에서 자기가 흘린 땀의 열매를 누리고자 하는 희망을 선포하는 오늘 본문말씀의 메시지는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들 모두의 간절한 희망이기도 합니다.

그 현실 가운데서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존재 의의가 무엇일까요? 바로 오늘 본문말씀에서 말하는 파수꾼과 같은 역할을 맡는 것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귀찮아하실 정도로 희망의 약속을 환기시키며 사람들을 각성시키는 역할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진정한 교회라면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성서가 전하는 위대한 해방의 유산을 상속받은 이들로서 몫을 다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따라, 이 땅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모든 이들이 저마다 자기가 흘린 땀의 열매를 누릴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하고, 그 삶을 위해 헌신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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