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위기 앞에서 - 창세기 4: 1~16[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8-08-26 14:13
조회
90
2018년 8월 26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삶의 위기 앞에서
본문: 창세기 4: 1~16



성서의 많은 이야기들, 특별히 창세기 전반부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보면 오늘날 합리적인 사고방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그저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정반대로 오늘 우리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으니 살짝 덮어둬도 되는 것일까요? 이 두 가지 태도 모두 적절하지 않습니다.
고도의 상징성을 띤 창세기의 이야기들은 인간의 실존에 관한 매우 깊은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자연에 대한 이해, 인간사회와 역사에 대한 이해, 인간 자신에 대한 이해, 그리고 그 모든 것들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이해에서 매우 중요한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또한 인간 삶의 실존을 깊이 있게 통찰하고 있습니다. <에덴의 동쪽>, 옛날 미국 배우 제임스 딘이 주인공으로 나온 영화제목이기도 하고, 꽤 오래 전에 방영된 한국 TV 드라마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바로 <에덴의 동쪽>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본문말씀의 맨 마지막 구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가인은 주 앞을 떠나서 에덴의 동쪽 놋 땅에서 살았다.” ‘에덴의 동쪽’은 낙원을 잃은 인간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을 말합니다. 여기서 그 땅의 이름이 ‘놋’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떠돌아다님’ 또는 ‘쉼 없음’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에덴의 동쪽’은 쉼 없이 고단을 노동을 하며 서로 불화와 갈등을 겪고 있는 인간 삶의 실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적나라한 삶의 실상이라 할 것입니다.
에덴의 동쪽이라는 상징적인 언어가 말하듯, 오늘 본문말씀은 인간 삶의 실상에 관한 아주 중요한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창세기 앞부분에 나오는 선악과 이야기가 고도의 상징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면 오늘 본문의 형제살해 이야기는 그에 비하면 매우 구체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형제살해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매우 분명하게 드러내주고 있는 반면 최초의 살인사건으로 귀결된 형제간의 갈등이 어째서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그 이유를 분명하게 밝혀 주고 있지 않습니다.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다 알고 있는 대로, 아담과 하와가 낳은 자식들로 가인과 아벨이 있었고, 카인은 농사를 짓고 아벨은 목축을 하는 사람이어서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 각기 자기가 거둔 소출을 제물로 바쳤는데, 카인이 드린 제물은 받지 않고 아벨의 제사만 하나님께서 받았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기본 배경입니다. 그래서 분노한 카인이 아벨을 불어내어 돌로 쳐 죽임으로써, 그는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커다란 의문을 갖게 됩니다. ‘도대체 어째서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물만 받고 카인의 제물은 받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성서 이야기 자체에는 암만 들여다보아도 그 이유를 알 만한 내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곡식보다는 고기를 더 좋아하셨나?’^^ 하는 피상적인 인상만 받을 수 있을 뿐 언뜻 봐서는 도대체 그 까닭을 알 수 없습니다.
오랫동안 이 본문말씀은 주석상의 논쟁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몇 가지 견해를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첫 번째 입장은 카인과 아벨의 갈등을 농경민과 유목민의 갈등으로 이해합니다. 당시 가나안 지역에는 농사를 짓는 사람들과 이스라엘의 조상들처럼 유목을 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유목민의 신앙이라는 것을 옹호하는 이야기로 해석하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입장은 소위 ‘켄족 가설’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주변에는 여러 민족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켄족’이라는 족속이 있었고, 모세의 장인도 이 ‘켄족’ 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켄족’은 이스라엘 민족과 마찬가지로(그리고 레갑인들과 더불어) 야훼 하나님 숭배자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스라엘 민족처럼 하나님의 선민으로 선택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인데도 하나님의 선민이 되지 못하고 미디안의 광야에서 유리방황하는 베두인처럼 살아가는 켄족의 기원을 이 이야기가 해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발음이 ‘카인’과 ‘켄’으로 유사하고, 그 켄족이 광야에서 유랑하는 삶을 살았다는 데서 착안한 해석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흔히 이해되는 신학적 이해방식입니다. 한마디로 인간이 드리는 제사, 예배를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매인 일이라는 해석입니다. 카인과 아벨 가운데 누가 더 정성을 들였고 안 들였는지 우리 인간적 안목에서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다 아시고 판단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해방식이 맞는 걸까요? 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해석이기는 하지만, 이 이야기는 보다 보편적인 인간 실존에 관한 이야기로 볼 때 그 진의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농경부족과 유목부족간의 갈등이라는 이해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지만, 단지 부족 내지는 종족간의 갈등 문제라기보다는 보다 보편적인 인간사회의 갈등에 관한 이야기로 볼 때 본문말씀의 진의를 더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최초의 살인사건으로서 이 이야기는 살인을 초래할 만큼 심각한 갈등관계를 전하고 있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이 때 주목할 수 있는 것이 인류역사상 등장한 사회적 분업과 그 분업의 등장과 함께 동반한 사회적 갈등입니다.
사회적 분업은 농경 정착생활이 시작되면서 등장합니다. 물론 수렵ㆍ채집을 하던 시절에도 분업은 있었습니다. 그 때의 분업은 대개 성적인 분업이었습니다. 한 공동체 전체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던 당시에는, 남자들은 밖으로 돌아다니며 수렵을 했고 여자들은 집을 지키며 채집을 했습니다. 수렵은 큰 힘을 필요로 했지만 불안정한 반면 채집은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안정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성들이 경제적 주도권을 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농경이 본격화되면서도 전혀 다른 양상을 띠기 시작했습니다. 농경은 곡물과 과일의 재배는 물론 동물의 사육까지 동반했습니다. 동물의 사육, 곧 가축을 기르는 일은 처음에는 소규모였지만 점차 확대되어 아예 그것만을 전담하는 집단이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유목민의 등장입니다. 농경과 유목이 웬만큼 풍요로워지기 시작하면서 사회적 관계는 이전과 전혀 달라졌습니다. 이전에는 한 마을, 한 공동체 전체가 먹고사는 문제를 공동으로 해결을 했고, 따라서 불평등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명의 이기가 발달하고 소출이 늘어나면서 사회적 분업이 명확해졌을 뿐 아니라 경제적 활동은 점차 가족단위를 중심으로 하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인식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소유’ 관념의 등장입니다. 사적 소유 관념입니다. 공동체적 공유 관계에서 사적 소유 관계가 사회의 중심원리로 등장하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서 인간사회의 갈등은 증폭하게 됩니다.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바로 그 갈등의 기원과 양상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담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사회적 분업과 사적인 소유 관념의 등장은 하나님에 대한 제의의 양상까지 바꿔놓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이야기를 보면 두 형제가 제사를 따로따로 드리고 있습니다. 한 하나님을 섬기는 한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따로따로 드리고 있습니다. 여기에 이해하기 어려운 본문말씀의 뜻을 헤아릴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있습니다. 한 마음이 되어, 하나가 되어 함께 드려야 할 예배가 각기 따로 드려지고 있는 상황 자체가 문제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한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로서 예배가 사적인 욕망을 드러내고 자신을 과시하는 행위로 전락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배 역시 경쟁의 행위로 전락했다고 할까요? 형제 사이의 관계의 파탄이 하나님과의 관계의 파탄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누가 왜 그와 같이 변질시켰는지 직접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본문말씀은 결과적으로 형인 카인에게 그 책임을 묻고 그의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함으로써 그 장본인이 카인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카인에게 묻습니다. “네가 잘했다면 왜 얼굴을 쳐들지 못하느냐?” 카인의 예배의 동기가 처음부터 잘못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동생을 제치고, 자기 자신만 하나님께 인정받으려 했던 카인의 태도를 암시하는 것 아닐까요?
하나님의 이 질책은 다른 형제와 이웃을 제치고 나만 살겠다고 생각하는 우리 모두를, 아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도록 조장하고 있는 오늘의 사회, 오늘의 세상을 향한 엄숙한 물음입니다.
이 물음 앞에서도 카인은 여전히 자신의 태도를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에게 질책하는 하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자신의 행위가 당연한 듯 여깁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책임을 묻는 하나님의 물음을 외면하고 갈 데까지 갑니다. 아벨을 불러내어 끝내 그를 살해하고 맙니다.
아우를 살해함으로써, 관계회복의 일말의 가능성마저도 송두리째 부정해 버린 카인은 이제 그 살인행위에 대해 직접적으로 책임을 묻는 하나님 앞에서마저도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로 일관합니다. 하나님께서 묻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아우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형제와 더불어 살아가야 할 인간 존재에 관한 근본적 물음입니다. 카인은 답합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여전히 책임회피를 하는 모습입니다. 형제의 고통에 아랑곳없이 자기 소유를 통해서만이 스스로의 삶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전형적인 대답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은, 인간들이 저마다의 소유에 기반한 경쟁관계를 형성하고 평화로운 인간간계를 파탄시킨 결과는 결국 인간의 생존조건 자체의 붕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네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네가 아무리 애를 써서 땅을 갈아도 이 땅은 더 이상 소출을 내 주지 않을 것이다.” 자신과 경쟁관계에 있던 아우를 제치고 나면 그 다음부터 땅에서 나온 모든 소출은 자기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카인, 인간이 맞이하게 되는 결과입니다. 아우와 더불어, 형제와 더불어 땅의 소출을 누리고자 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허용하지만, 혼자 누리고자 할 때에는 아무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사회의 도덕과 윤리의 기원이 어디에 있을까요? 서로 돕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절박한 삶의 위기에 그 기원이 있다고 봅니다. 말하자면 협업이 원초적인 도덕의 기초라는 이야기입니다. 서로 돕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에 상대를 존중하고 공정한 절차를 존중하고, 마침내 모든 사람이 만족할 만한 정의를 추구하게 된 것입니다. 인류는 오랜 세월 그렇게 살았기에 육체적 능력이 취약함에도 불구하고 번성하고 문명을 일궈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도덕적 삶에 위기가 닥쳤습니다. 사회적 분업이 뚜렷해지고, 그와 더불어 격차가 발생하면서 그 도덕은 배타적 성격을 띠고 갈등을 증폭시키게 된 것입니다.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그 첫 번째 심각한 위기에 대한 깊은 통찰을 함축합니다.
그 위기는 아마도 수천 년 전, 아니 나아가 1만년 전 그 순간의 위기로 그치지 않고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모습도 그렇게 닮아 있지 않습니까? 특별히 자본의 전능함을 믿는 오늘 신자유주의 시대 그 위기는 더욱 심각합니다.
카인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오늘 이렇게 바꿔 읽을 수 있지 않을까요? ‘해고되고 실직한 너희 형제들이 어디 있느냐? ... 이제 이 회사가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애를 써봐도 해고된 동료들의 피눈물을 흘리게 한 이 회사는 잘 될 턱이 없다.’ 자본의 이윤 추구와 이를 위한 경쟁력 강화가 평범한 모든 사람들의 인간다운 삶의 방식은 완전히 밀쳐내고 있지 않습니까? 기업경영에서만 문제가 아니라, 효율과 경쟁력 강화는 교육을 포함한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유일한 기준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방식 그대로 나가면 끝내 우리의 인간다운 삶은 완전히 파탄날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말씀에서 하나님의 카인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은 오늘 우리 시대를 향한 경종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다행스러운 것은 죄를 범한 카인을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죽음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파멸의 상황을 비로소 실감하고서 두려워하는 카인에게 하나님은 오히려 그를 지켜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오히려 카인을 죽이는 자에게 일곱 배의 벌을 내리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죄를 범한 카인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허락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다시 기회를 허락할 터이니 관계의 회복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아라!’하는 말씀입니다.
사적인 소유를 바탕으로 하고 끊임없이 그에 대한 욕망을 부추기는 삶의 방식으로 인해 발생한 사람들의 관계파탄, 그리고 이로부터 이어진 땅의 파괴 현상이 항구적인 징벌로, 자연적 질서로 용인될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하는 말씀입니다. 인간사회에 그렇게 파멸로 치닫게 내버려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범죄한 카인의 생명에 대한 보존은, 인간이 파멸적인 삶으로부터 돌이킬 때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가 회복된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라고 하나님께서 물으실 때, “제 아우는 바로 곁에 있습니다.”라고 답할 수 있을 때 저마다의 삶이 온전하게 보존되는 진실을,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그 진실을 되새기며,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일구기 위해 헌신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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