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길 수 없는 삶과 노동 - 이사야 62:6~9 [쌍용자동차해고자 복직촉구 기도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8-08-31 08:25
조회
71
2018년 8월 30일(일) 오후 7:00 쌍용자동차해고자 복직촉구 기도회

제목: 빼앗길 수 없는 삶과 노동

본문: 이사야 62:6~9

 

쌍용자동차 해고자 복직촉구를 위해 마음을 모으고 있는 오늘 우리는 예언자 이사야의 선포를 함께 읽었습니다. 본문말씀은 바빌론 포로 생활이 끝나가고 해방의 서광이 비쳐오는 현실에서 예언자 이사야가 희망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본문말씀의 앞부분은 하나님의 약속은 기필코 이뤄질 것이므로 파수꾼들은 그 약속이 이뤄지는 상황을 눈여겨 지켜볼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파수꾼이 그냥 지켜보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하신 약속을 늘 주께 상기시켜 드려야 할 너희는,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 늘 상기시켜 드려야 한다.” 파수꾼은 그저 기다리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장차 이뤄지길 바라는 그 희망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존재로서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더욱 재미있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주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실 때까지 쉬시지 못하게 해야 한다.” 하나님을 귀찮게 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그 만큼 절절하게 희망을 이루기 위해 애쓰라는 이야기입니다.

 

본문말씀은 이어서 장차 이뤄질 일을 구체적으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내가 다시는 네 곡식을 네 원수들의 식량으로 내주지 않겠다. 다시는 네가 수고하여 얻은 포도주를 이방 사람들이 마시도록 내 주지 않겠다.’ 곡식을 거둔 사람이, 곡식을 빼앗기지 않고 자기가 거둔 것을 먹고, 주님을 찬송할 것이다. ‘거둔 사람이 자기가 거둔 것을 내 성소 뜰에서 마실 것이다.’”

우선 이 말씀은, 유대 백성이 겪었던 현실을 그대로 환기하고 있습니다. 유대 백성은 바빌론제국에 나라를 멸망당하고, 그 지도자들이 포로로 붙잡혀 갔고, 당연히 그들이 땀 흘려 거둔 소출을 이방의 제국에 빼앗겼습니다. 이 말씀은 바로 그 현실을 환기시키며, 다시 회복될 나라에서는 더 이상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잘 음미해보시기 바랍니다. 자기가 땀 흘려 거둔 것을 남에게 빼앗기지 않고 자기 스스로 누린다는 이 선포는 모든 사람들의 평범한 소망을 말하는 것이자 동시에 정의의 핵심적 요체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정의의 핵심적 요체가 무엇입니까? 누구에게나, 각자에게 정당한 몫이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정의의 요체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초점은 내가 거둔 것이니 내 마음대로 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이 그 누군가 다른 사람이나 세력으로부터 침해당하거나 지배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의를 깨트리는 것은 지배와 억압, 그리고 수탈입니다. 바로 그 현실에서 예언자는 이제 누구에게나 정당한 몫이 돌아가고 누구나 자기 땀의 결과를 누리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라 선포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흘린 땀의 결과를 누리지 못하는 현실이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그저 억울한 상태에 처해 있다는 것뿐 아니라 나아가 자기 삶을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말합니다. 생존 자체가 위협을 겪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선택을 해야만 합니까?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타의에 의해 땀의 결과를 빼앗기고 결국 자기 삶 자체를 빼앗긴 현실에서, 자기가 흘린 땀의 결과를 빼앗기지 않음으로써 자기 삶을 누리게 될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바로 그 소망이 이뤄질 때 비로소 사람들은 하나님을 온전히 찬양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곡식을 거둔 사람이, 곡식을 빼앗기지 않고 자기가 거둔 것을 먹고, 주님을 찬송할 것이다. 거둔 사람이 자기가 거둔 것을 내 성소 뜰에서 마실 것이다.”

더 이상 탄식하지 않고 저마다 삶의 기쁨을 만끽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리라는 간절한 희망입니다.

 

본문말씀이 전하는 상황과 가장 가까운 범례를 우리 역사에서 찾는다면 일제에 의한 식민지배의 상황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 현실을 기억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일까요? 징용과 공출, 사람에게 강제노동을 강요하고 물자를 강제로 수탈하는 것입니다. 식민지배는 단적으로 인간의 주체적 삶을 부정한다는 데 그 본질이 있습니다. 사람들 스스로가 자신의 삶을 결정할 수 있도록 보장하지 않고 통치세력이 폭력으로 사람들의 운명을 결정해버릴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의 생명을 영위하기 위해 땀을 흘려 거둔 소출마저 빼앗아가 버리는 사태를 이민족 통치세력과 국가권력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것이 식민지배의 본질입니다.

본문말씀에서 예언자 이사야가 선포하고 있는 간절한 희망의 메시지는 바로 그 우리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그 제국주의 시대의 유산을 온전히 극복하지 못하였습니다. 최근 밝혀진 바로는 과거 정부 시절 사법농단의 여러 사례 가운데 하나로, 일제 당시 징용당해 강제노동을 해야만 했던 사람들의 개인 청구권마저 가로 막으려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정말 촛불혁명이 성공하지 않았더라면 이 나라가 어찌 되었을까요? 소름이 돋고 오싹해질 지경입니다.

 

그런데 이민족의 지배로부터 벗어났다고 해서 자기 땅에서 자기가 흘린 땀의 열매를 온전히 누리게 된 것은 아닙니다.

“노동은 노동자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을 통해 자기 자신을 긍정하지 않고 부정하며, 행복을 느끼지 않고 불행을 느끼며, 자유로운 신체적 정신적 에너지를 개발하지 못하고, 자신의 신체를 채찍질하고 자신의 정신을 황폐화한다. 따라서 노동자는 노동 바깥에 있을 때 비로소 안도감을 느끼며 노동을 할 때에는 탈아감을 느낀다.”(칼 맑스 <경제학 철학 수고>)

어떻습니까?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의 성격을 예리하게 통찰하고 있는 것으로, 이른바 소외된 노동, 노동의 소외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노동이 자기를 실현하는 것과 상관없이 소외되어 있는 현실입니다. 그러니까 노동을 하면 할수록 자기가 원하는 삶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멀어지는 현실입니다. 그러니 일터에서 벗어났을 때야 비로소 안도감을 느끼고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아차리는 상황입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차별, 성별격차, 뿐만 아니라 각종 출신과 등급에 따라 노동이 분절화되어 있는 한국사회에서 그 소외는 더욱 극심합니다.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 현 정부가 표방한 바이지만, 그 성과는 아직 불투명합니다. 그러기에 자기 땅에서 자기가 흘린 땀의 열매를 누리고자 하는 희망은 지금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 모두에게 여전히 간절한 희망입니다.

 

쌍용자동차 사태는 숱하게 산적해 있는 노동문제를 보여주는 단지 하나의 사태가 아닙니다. 쌍용자동차 사태는 신자유주의 시대 우리 사회의 노동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종의 시금석입니다. 속칭 ‘노동문제 백화점’이라 불릴 만큼 우리 사회의 노동문제가 얽히고설킨 현장의 극명한 사례입니다. 2009년 대량 해고사태와 쟁의, 그리고 사실상 대테러전에 준하는 쟁의 진압 사태는 철저하게 자본과 이를 비호하는 부당한 국가권력에 의해 일어난 사태입니다. 30번째의 죽음! 왜 유독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목숨을 끊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겠습니까? 전쟁과 다를 바 없는 그 참화로 인한 상처가 깊기 때문입니다. 이 나라 경찰이 죽였고, 이명박이 죽였습니다.

그 사태가 발생하기 이전까지 노동자들은 열심히 일하였고, 쌍용자동차는 이른바 구조조정을 해야 할 만큼 부실한 기업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신자유주의 파고 가운데서 외자유치를 위해 우량기업도 그 대상으로 해야 한다는 논리에 따라 외국자본을 끌어들이면서부터 문제가 시작되었습니다. 실질적인 투자는 이뤄지지 않았고, 기술만 유출되는 가운데, 느닷없이 불량기업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경영부실이 있었고, 이어 심각한 회계조작이 있었다는 것은 만천하가 아는 일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비용절감을 위해 노동자를 해고시키기 위한 구실을 만드는 과정에서 벌어진 사태입니다. 경영의 책임은 시비의 대상도 되지 못하였고, 기업의 부담을 전적으로 노동자들에게 전가시키면서 발생한 문제였습니다. 그저 열심히 일하면서 자신과 가족의 삶을 지키고자 한 노동자들에게는 영문을 알 수 없는 날벼락이었습니다. 경영의 부실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은 “함께 살자”며 기업을 살리기 위해 뜻을 모으고, 부당한 구조조정에 저항하였지만, 자본과 권력은 이를 무자비하게 짓밟았습니다.

이후 엎치락뒤치락하는 판결과 협의가 있었지만, 해고된 노동자들의 복직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촛불혁명으로 새 정부에 들어서 기대감이 높아졌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지난 6월 29일 김주중 열사의 30번째 죽음, 그 비보가 전해졌습니다.

 

쌍용자동차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우리 사회에서 노동존중의 사회를 말할 수 없습니다. 아니 지금 정부가 말하는 공정성과 정의, 교과서적 상식으로 통용되는 공정성과 정의, 그리고 인권을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완전히 기울어진 마당에서 노동자들이 전적으로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당한 사태이기 때문입니다. 폭력적으로 인권이 유린된 사태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태가 해결되지 않고는 이 땅에 건강한 윤리적 척도를 세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 척도가 무엇입니까? 열심히 일하고 땀을 흘리면 마땅히 자기가 흘린 땀의 결과를 누리며 당당히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정의는 추상적인 어떤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이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저 열심히 일한 결과가 해고요 죽음이라면 그 사회 자체가 이미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죽음 가운데서 부활의 희망을 바라고 믿고 있습니다. 죽음, 아니 죽임의 사태가 어떻게 발생하였는지, 그 사태를 야기한 세력들이 얼마나 사악한지를 직시할 때, 우리는 죽음으로 몰아넣는 그 힘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이 전하고 있는 파수꾼의 역할처럼, 우리가 믿는 진실과 희망을 끊임없이 환기시켜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귀찮게 하고, 세상을 귀찮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희망이 이뤄지는 날까지 그렇게 해야 합니다. 더 이상 죽음에 굴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복직되는 날까지, 뿐만 아니라 이 땅 여기저기서 절규하며 너무나도 당연한 노동의 권리를 외치는 노동자들의 평범한 꿈이 이뤄지는 날까지 지치지 않고 나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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