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공동체 - 데살로니가전서 1:2~10 [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8-09-02 14:15
조회
55
2018년 9월 2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공동체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1:2~10



데살로니가전서는 최초의 바울 서신, 따라서 오늘날 전해진 신약성서 가운데 최초의 문서입니다.
바울은 선교여행 중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고, 심심치 않게 머물렀던 지역에서 추방을 당해야 하는 일을 겪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선교활동에 본격적으로 나선이래 빌립보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소요사태로 고발당해 빌립보를 떠나게 되었고(사도 16장), 데살로니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는 마케도니아의 주요 도시 가운데 하나로서 로마제국 시대에는 매우 번성한 국제적인 무역항이었습니다. 바울은 그곳에서 머물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그로 말미암아 데살로니가에 교회 공동체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울 일행은 그곳에서 다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바울 일행은 그곳에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지만 다시 살아나셨다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리스인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선포에 귀를 기울이고 받아들였지만, 완고한 전통에 매인 많은 유대인들은 바울의 선포에 반감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소동을 일으키고 결국 당국에 고발함으로써 바울 일행은 그곳에서 추방을 당하게 되었습니다(사도 17:1~9).
선동으로 인해 공공질서를 파괴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어간 49년에는 로마의 황제 클라디우스가 로마시에 있는 유대인들을 추방하는 칙령을 내렸습니다. 그 칙령은 제국 내의 다른 지역에도 모종의 영향력을 끼쳤으리라 예상됩니다. 유대인들은 붙으면 뭔가 소동을 일으키는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퍼져 있었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유대인들로만 구성되었던 것은 아니고, 데살로니가교회처럼 오히려 그리스인이 중심을 이루기도 했지만, 한 유대인의 가르침을 따르는 무리들은 경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의 일행은 그런 분위기 가운데서 데살로니가로부터 추방을 당합니다.
바울은 아가야지역의 아테네를 거쳐 고린도에 이르게 됩니다. 데살로니가전서는 아테네에서 디모데를 보내 공동체의 정황을 확인한 후 고린도에 머무르는 동안 기록되어 전해진 서신입니다(50~52년 어간).

앞서 말한 그런 상황 때문에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교우들의 상황을 무척 염려했습니다. 오랜 시간 지속되어왔던 공동체도 아니고 겨우 시작된 교회 공동체인데, 그 씨앗을 뿌린 사도로서 그들을 직접 돌볼 수 없는 처지에 있었으니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재차 방문을 시도하였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도리 없이 제자 디모데를 데살로니가교회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디모데는 뜻밖의 기쁜 소식을 안고 왔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 교우들이 너무나도 모범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물론 데살로니가전서 전체를 보면, 외부적 박해의 상황뿐 아니라 내부적으로 잘못된 신앙으로 혼란에 빠질 수 있는 소지가 없었던 것이 아니기에 이에 대해 염려하며 권면하는 내용이 나오기는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곧 그 서신의 첫 대목은 사도 바울이 염려했던 상황과는 달리 데살로니가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도 모범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격려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감사히 여기며 격려를 아끼지 않는 데살로니가교회의 모습은, 당대의 교회의 모습으로서 뿐만 아니라 시대를 뛰어넘는 교회의 존재방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 가운데 여러분을 기억하여 말하면서, 여러분 모두를 두고,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둔 소망의 인내를, 언제나 기억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익숙한 내용들을 접합니다. ‘믿음’, ‘사랑’, ‘소망’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순서와는 다르지만 그대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절대적 덕목이라고 할까요?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답게,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는 중심 가치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가치들이 어떻게 지켜지고 있는지 각기 그에 상응하는 개념들이 덧붙여지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입니다. ‘믿음의 행위’,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가 그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마음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현된다는 것, 그 믿음을 따라 사랑을 이루는 데는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그 사랑의 삶이 마침내 온전히 이뤄지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는 인내를 필요로 한다는 것으로 그 뜻을 새길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초점은,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답게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가치가 구체적인 삶으로 구현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행위’,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들의 삶의 태도를 구체적으로 꼬집어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각고의 노력과 단련을 통해 실현되는 삶의 가치를 뜻합니다.

사도 바울의 이와 같은 논조는 그 다음 이어지는 말씀에서도 일관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하나님께서 택하여 주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여러분에게 복음을 말로만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러분 가운데서 여러분을 위하여 어떻게 처신하였는지를,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또한 여러분은 많은 환난 가운데서도, 성령이 주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서, 우리와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택하여 주셨다’는 표현은 후대에 교리화된 예정론을 말한다기보다는 어려운 조건 가운데서 어떻게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지킬 수 있었는지 놀라며 그 근원으로서 하나님의 돌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선택되었기 때문에 모범이 된 것이 아니라, 모범이 된 그 삶을 하나님의 선택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사도는 복음을 전한 자신이 말로써만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확신으로 전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삶의 모범을 보였고, 그것이 가능한 삶의 밑바탕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줬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의 삶의 진정성을 말합니다. 이를 받아들인 데살로니가 교회 교우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받아들여 주님을 본받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들의 삶이 변화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의 삶의 모범으로서 데살로니가 교회 교우들의 삶은 그들만의 배타적인 삶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 삶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현실의 여러 족쇄 때문에 그렇게 살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본문말씀은 이렇게 전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이들에게 모범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서부터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만 울려 퍼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의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두루 퍼졌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두고는, 우리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두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을 찾아갔을 때에 어떠한 영접을 받았는지, 어떻게 해서 여러분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 어떻게 해서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리신 그분의 아들, 곧 장차 닥쳐 올 진노에서 우리를 건져 주실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오시기를 기다리는지를, 퍼뜨리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교우들의 삶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회자되고 있고, 이들의 입을 통해 널리 전파되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의 삶이 전파될 때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수가 전파되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점입니다. 이것은 막연한 이야기가 아니라, 당대 사람들의 일반적인 삶의 방식이 어떤 것이었는지 그 일반적인 삶의 방식에서 어떤 삶의 방식으로 전환을 하였는지를 짚어주는 말씀입니다.
이들이 이전에는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당시 일반 사람들은 쥬피터, 디아나, 이시스와 미트라 등과 같은 신을 숭배했습니다. 이 신들은 자신들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제물을 요구하였고, 제관들에게 돈을 기부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 신들은 마치 인간들처럼 자신들의 이해(利害)에 따라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사랑을 펼치시고, 그 사랑을 통해 인간들 사이에서 사랑을 불러일으킨다고 믿었습니다.
그 믿음은 이방인들과는 전혀 다른 윤리관을 형성하였고, 그 윤리관에 따라 전혀 다른 삶을 살게 했습니다. 이방인들, 곧 당시의 일반인들이 자신들이 섬기는 신들의 축제를 위하여 그 축제 비용을 징세 당하고 있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거리와 쓰레기장에 버려진 고아들을 먹여 살리는 공동기금에 자발적으로 기부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광산에서 강제노역을 하거나 섬에 유배된 사람들과 감옥에 갇힌 사람들에게 음식과 약을 주고 친구가 되었습니다. 죽어서도 무덤에 묻힐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과 죄수들에게는 자비로 관을 사서 매장을 해 주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 그 삶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의 전반적인 기조는, 바로 그 전형적인 초기 그리스도인의 삶을 충분히 연상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바로 그 삶이 복음을 전파시키는 가장 큰 동인이었습니다. 사도들과 같은 선각자들의 복음전파도 중요했지만, 바로 그러한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로서 교회의 존재 자체가 복음을 전파하는 가장 근본적인 동인이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진실입니다.

최초의 서신, 최초의 신약성서 기록으로서 데살로니가전서는, 어찌 보면 바울의 다른 서신서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첨예한 논쟁적 성격을 띠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인 기조가 그렇게 논쟁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 주요 기조는 모범적인 데살로니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격려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서신은 그 삶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다른 어떤 서신보다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교 교회에서 상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중요한 개념이 이 서신서에 모두 등장합니다.
‘교회’, ‘주님’, ‘복음’, ‘임재’, ‘영접’... 그 의미를 데살로니가전서는 본래 통용되던 의미로부터 모두 그 의미를 전복시키고 있습니다. ‘교회’는 ‘에클레시아’ 곧 ‘민회’를 뜻하는 말로 표현됩니다(1:1). ‘주님’(퀴리오스)은 당시 황제에 대한 극존칭이었으며, ‘복음’(유앙겔리온)이라는 말 역시 황제의 등극을 환호하는 표현이었습니다. ‘임재’(파루시아)는 황제가 나타나는 것을 말했고, ‘영접’(아판테시스) 또한 황제를 맞이하는 것을 뜻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황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하고 있습니다(4:13~18).
이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공동체로서 교회의 존재방식이 당대 세상질서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대안적 삶의 방식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는 세상 밖에 있지 아니하고 세상 안에 있으되 지금 세상을 지배하는 질서와는 전혀 다른 질서를 구성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세상 안에 있으되 전혀 다른 삶으로 세상의 일반적인 삶과는 다른 삶의 대안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복음을 구현하는 것이며, 그것이 곧 교회의 존재의의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이 전하는 마땅한 진실이 과연 마땅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을까요? 복음전파의 열정은 드높지만 그 복음을 삶으로 구현하고자 하는 열정은 박약한 게 한국교회 현실입니다. 교회가 많고, 제2의 선교대국으로 수없이 많은 나라들에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사들이 많지만, 정작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서 물신의 우상이 척결되지 않고 있는 현실을 보면 복음을 삶으로 구현하려는 의지는 여전히 빈약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서구 기독교역사에서 해외선교가 절정에 달했을 때 독일교회 안에서는 해외선교가 아니라 내지선교 운동이 일었습니다. 이미 기독교화되어 있는 사회에서 무슨 선교가 더 필요했을까요? 그것은 그 사회에서 진짜 복음화가 이뤄져야 한다는 각성이었습니다. 그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교회가 나서야 한다는 운동이었습니다. 해외선교의 의의를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의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도 해결 못하면서 복음을 전파하겠다는 것은 기만이 아니냐는 각성이었습니다. 그 내지선교는 결국 당대의 가장 첨예한 문제로 떠오른 노동자들의 권리를 옹호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을 중심과제로 하였습니다. 독일교회의 그 내지선교가 오늘의 사회국가 내지는 복지국가로서 독일을 형성한 가장 중요한 기반이었습니다.
많은 한국 기독교인들은 서구 기독교는 몰락하고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우쭐해합니다. 서구 기독교가 세속화되어 그 정체성이 사라진 반면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자만감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겉모습만 보면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사회를 버티게 하는 가치와 제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들의 가치관을 보자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의 진정한 뜻을 삶으로서 실현하고 있느냐 하는 점에서는 정반대입니다.
삶으로 구현되지 않은 복음, 그것은 기만이요 미망입니다. ‘믿음의 행위’,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로 나아가는 그리스도인과 교회, 오늘 말씀의 그 진실을 다시 새기며, 정말 존재 그 자체로 복음전파의 몫을 다하는 우리 그리스도인, 그리고 우리 교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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