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짐을 져 줍시다 - 갈라디아서 6:1~10[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8-09-09 14:18
조회
51
2018년 9월 9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서로 짐을 져 줍시다
본문: 갈라디아서 6:1~10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지역의 교회에 보내는 바울의 친서 가운데 하나로서, 데살로니가전서에 이은 두 번째 편지입니다. 그 기록 연대는 데살로니가전서가 씌어진 50~52년보다 다소 늦은 시기로 대략 54~55년경으로 추정됩니다. 갈라디아는 소아시아의 중부지역, 곧 오늘날 터키의 수도 앙카라가 있는 중부 지역에 해당합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16:6; 18:23), 사도 바울은 이 지역을 두 차례에 걸쳐 방문하고 복음을 전파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마치 ‘날선 검’과 같은 것으로 비유되는데,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논조와 내용으로 보아, 사도 바울의 복음전파의 영향을 받았던 갈라디아 교회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것에 대처하는 서신으로서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은 종교적 규율, 곧 율법의 준수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훼손하는 사태에 대해 경고하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자유, 인간의 자유를 역설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의 핵심 사상으로 여겨져 온 ‘인의론’이 제기되며, 그것은 전통적인 유대교와 구분되는 그리스도교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갈라디아서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사상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선명하게 보여주는 서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인의론은 그리스도교 사상의 핵심으로 간주되어 왔습니다. 이 인의론은 로마서에도 다시 강조되고 있지만, 로마를 방문하지 않은 가운데 자신에 대한 소개의 성격을 지닌 로마서와 달리 그 문제의식을 처음 본격적으로 펼친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 교회들의 구체적 정황과 관련되어 있어 그 만큼 생생합니다. 최초로 그 문제의식이 드러나게 된 정황을 파악함으로써 우리는 그 문제의식이 함축하고 있는 핵심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 서신의 수신자들의 정황을 파악할 때 항상 유념해야 하는 것은, 하나의 종교적 공동체이자 동시에 유력한 사회적 안전망의 하나로서 디아스포라 유대인 공동체로서 회당의 상황입니다. 특별히 디아스포라 유대인 회당에는 혈통으로나 사상으로나 정통적인 유대인들만 그 구성원으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개종자 등 다른 부류의 구성원들이 함께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인의론이 제기된 구체적 맥락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요건입니다.
정통적인 유대인들에게 율법의 준수는 필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본래 이방인이었던 개종자들의 경우에는 그 율법의 준수에 철저하지 못했고, 정통파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는 갈등이 존재했습니다. 이방인들은 유대교 회당을 중심으로 해서 볼 때 주변인이었고 따라서 약자들이었습니다. 여기서 바울의 인의론은 그 약자들을 옹호하고 대변하는 주장으로 제기되었습니다. 그것은 현대적 의미에서 정당한 권리를 갖지 못하는 사람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인권론으로서 의의를 지닌 것이었습니다. 그 요체는, 그리스도 안에서는 어떤 자격에 상관없이 모두가 진정한 자유를 누린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의 후반부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진정한 자유에 대해 역설합니다. 그것은 진정으로 자유를 가능케 하는 삶의 방식이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강조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얻는 진정한 자유의 의미와 그 혁명성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다른 문서를 통해 간접적으로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네가 ‘나는 유다인이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누구 하나 동요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네가 ‘나는 로마인이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누구 하나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네가 ‘나는 헬라인, 야만인, 노예, [자유인]이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누구 하나 혼란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네가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고 말한다면, 그 때는 [하늘 전체가] 뒤흔들릴 것이다.”(나그함마디의 <빌립복음>가운데서).

이제 오늘 본문말씀이 함축하고 있는 요체에 접근하고자 합니다. 바로 앞에서 바울은 진정으로 자유를 가능케 하는 삶의 방식에 관해 역설하였습니다. 그것은 성령을 따르는 삶으로, 그 삶은 성령의 열매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인내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5:22~23).
바로 그 권면이 보다 일반적 성격을 띠고 있다면, 오늘 본문말씀은 갈라디아 공동체가 처해 있는 모종의 특수한 상황을 유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오늘 본문말씀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가능하게 하는 각 개인의 마음의 밑바탕, 그리고 그에 기초하여 이뤄지는 구체적인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핵심적 요체를 일깨워줍니다. 대안적 삶의 방식을 이루는 근본 바탕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어떤 사람이 어떤 죄에 빠진 일이 드러나면, 성령의 지도를 받아 사는 여러분은 온유한 마음으로 그런 사람을 바로잡아 주고, 자기 스스로를 살펴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여러분은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이런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십시오. 어떤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면서 무엇이 된 것처럼 생각하면, 그는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각 사람은 자기 행실을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자기에게는 자랑거리가 있더라도, 남에게까지 자랑할 것은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각각 자기 몫의 짐을 져야 합니다. 말씀을 배우는 사람은 가르치는 사람과 모든 좋은 것을 같이 나누어야 합니다.”(1~6)

“어떤 사람이 죄에 빠진 일이 드러나게 되는 상황”은 갈라디아 공동체 안에 있을 수 있는 어떤 상황을 말합니다. 앞에서(5장) 바울은 자유가 방종에 빠질 가능성, 육의 행실의 문제점을 힘주어 역설하였는데, 그것은 갈라디아 공동체가 처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 상황은 갈라디아 공동체가 율법을 따르는 길에 빠져 든 정황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율법을 따라 사람을 가르는 행위를 말합니다. 법이 정의의 척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법이 범죄를 만들어내는 상황입니다. 법을 지킴으로써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의를 훼손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일어날 수 있는 악덕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죄를 범한 사람을 문제시하기보다는 그를 다루는 사람의 태도를 오히려 문제시합니다.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온유한 마음으로 그런 사람을 바로잡아 주고, 자기 스스로를 살펴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합니다. 이 권면의 내용은 그리스 철학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한마디로 자기성찰을 강조한 것입니다. 델피의 신전에 기록된 유명한 경구이자 소크라테스에 의해 강조된 “너 자신을 알라.” 하는 격언과 통하는 권면입니다.
유혹에 빠지지 말라는 이야기는 자기 의를 드러내고자 하거나 그렇게 함으로써 육의 행실에 빠질 것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범죄자들을 판단하는 사람들의 독선적인 태도가 범죄행위보다 더 큰 손상을 공동체에 입힐 가능성을 간파하고 있습니다. 명확한 잘못은 바로잡을 가능성이 있지만, 마음의 독선은 도무지 바로잡기 어려울 뿐 아니라 모르는 가운데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이어 서로 남의 짐을 져주라는 권면 역시 그리스 철학에서 유래하여 널리 유포된 격언입니다. “사람은 친구들이 진 짐을 나누어 져야 한다”(소크라테스). 여기서 짐은 그리스도인들이 저지른 실수를 말하는 것으로, 그것이 일상적인 생활 가운데서 짐이 되었을 때 그것을 함께 나누어 져야 한다는 것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실수를 바로 잡을 뿐 아니라 다른 동료가 실수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 격언에 덧붙여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법’을 완성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이는 일반적 격언의 의미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연결시키고 있는 셈인데, ‘그리스도의 법’이라는 말은 바울에게서 여기서만 단 한번 사용된 것으로 매우 생경합니다. 바울이 그와 같은 용어를 사용한 것은, 앞에서 율법의 성취로서 사랑을 말했던 것과 유사한 맥락에 있으며, 율법에 매인 사람들에게 설득하고자 하는 의도를 지닌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니면서 뭔가 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을 경계한 것 역시 “너 자신을 알라”는 격언과 뜻을 같이합니다. 남과 비교해서 자기가 뭔가 된 것처럼 착각하지 말고 오로지 자기 자신의 행실을 돌아보라는 격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형태로 변형된 격언을 계속 되풀이함으로써 바울은 일관되게 자기성찰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점에서 바울의 주장은 그리스 철학자들의 주장과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철학자들이 성찰의 근거를 이성에서 찾고 있다면 바울은 은혜에서 찾고 있다는 점이 다릅니다.
자기의 짐을 지라는 이야기 역시 크게 보아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자신을 알고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몫을 분명히 알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격언이 서로 남의 짐을 져 주라는 격언과 모순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몫을 감당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야 남의 짐을 져 줄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격언은 다시 좋은 것을 함께 나누라는 것입니다. 이 격언 역시 그리스 철학자들의 전통에서 스승과 학생이 모든 것을 공유하는 정신을 환기할 뿐 아니라, 심지어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한 구절 곧 “나에게 이 기술을 가르쳐 주신 자를 나의 부모와 똑같이 생각하는 것, 그리고 나의 삶을 그와 협력하여 사는 것, 그리고 그가 필요로 한다면 그에게 나의 몫을 주는 것...”이라는 구절을 연상시킵니다. 바울은 여기서 말씀을 매개로 그 나눔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공동체 안의 가르치는 사람들의 몫을 나타냅니다. 배우는 사람들이 그들과 협력하여 공동체를 완성할 것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같은 뜻을 지닌 격언을 누차 반복한 바울은 마지막으로 역시 동일한 뜻을 지닌 ‘자기를 속이지 말라’는 격언으로 정리하며 이를 종말론적 차원으로 연결시킨다.

“자기를 속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조롱을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둘 것입니다. 자기 육체의 욕망을 따라 심는 사람은 육체로부터 썩을 것을 거두고, 성령의 뜻을 따라 심는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둘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지쳐서 넘어지지 않으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있는 동안에,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합시다. 특히 믿음의 식구들에게는 더욱 그렇게 합시다.”(7~10)

자기를 속이지 말라는 격언에 곧바로 연결되는 하나님은 조롱을 당하는 분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자기를 속일지언정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속일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을 함으로써 더욱 분명하게 종말론적 의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바울은 앞에서 말했던 육과 영의 이원론으로, 그 열매를 양극으로 갈라 말합니다. 육이 바라는 것을 따라 심는 사람은 썩을 것을 거두고 영이 바라는 것을 따라 심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거두리라고 합니다. 통상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한 바울은 자기 책임의 문제를 등한시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으나, 5장에서부터 여기까지 이어지는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스스로의 선택의 차원과 그에 따르는 책임의 문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구원에 이르는 길인지,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일인지 깨닫고 선택할 수 있는 윤리적 주체로서 책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극명한 대비에 이어 긍정적인 언어로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말 것을 권면합니다. 지쳐 넘어지지 않으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이라는 희망적인 선포입니다. 이것은 5장에서 말한 성령의 열매를 말한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낙심하지 않고 지쳐 넘어지지 않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보편적인 사랑의 윤리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우리를 지탱시켜줍니다.
마지막 결구는 특히 믿음의 식구들에게 더욱 그렇게 할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배타적 경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보편적 사랑의 윤리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출발점을 말합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형제자매들에 대한 충실성을 배제하고 추상적인 박애를 실현할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로서 교회가 그 사랑을 이루지 못하면서 세상에 그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한 구절 한 구절 그 의미를 헤아리다 보니 조금씩 그 강조점이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오늘 본문말씀은 분명한 일관된 초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그리스도인의 근본 마음 바탕을 확인해줌과 동시에 그것이 내 곁의 자매형제에게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지를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로 모든 사람이 자유를 누리게 되는, 그 삶이 어떻게 지켜질 수 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모든 사람이 진실로 하나님 앞에서 겸허해져야 한다는 것, 인간이 쌓은 업적과 제도, 가치판단을 끊임없이 상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자기 의를 내세움으로써 독선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는 것, 서로가 서로의 짐을 나눠질 수 있어야 하고 서로 협력해야 한다는 것을 오늘 본문말씀은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성서의 말씀은 이렇게 분명하게 우리를 일깨워주고 있는데, 어쩌다 한국교회는 한국 기독교인들은 어설픈 선민의식과 독선에 사로잡히게 되었을까요? 성경 말씀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탓이요, 예수를 잘못 믿은 탓입니다.
오늘 말씀의 진실을 되새김으로써, 진정으로 모든 사람이 자유를 누리는 데 기여하는 교회,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결단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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