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금지. 사랑이 이깁니다! - 야고보서 2:1~13[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8-09-30 14:56
조회
42
2018년 9월 30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차별금지. 사랑이 이깁니다!
본문: 야고보서 2:1~13



오랜만에 야고보서의 말씀을 함께 읽었습니다. 야고보서는 신약성서 안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공동서신, 그러니까 특정 교회에 보내진 편지가 아니라 초기교회 시대 여러 교회에서 널리 읽혀진 서신 가운데 하나인 야고보서는 우선 바울의 서신서들과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구별됩니다.
초기교회가 어느 시점을 지나면서부터는 바울의 서신에서 가르친 내용이 중심이 되고, 그 까닭에 바울 이후의 서신서들도 바울의 권위에 의존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의 주장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그리스도교 교리를 형성하는 데도 결정적 기여를 하였습니다. 바울서신의 핵심요체가 무엇입니까? 오직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체의 업적과 보상의 논리를 배격하는 인권선언으로서 의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 의미가 퇴색되고 그저 하나의 교리적 명제로만 굳어져 있습니다. 그 현상은 이미 초기교회에서도 나타났습니다. 그 실질적 의미가 사라지고 형식적인 명제만 남게 된 상황입니다. 야고보서는 그런 상황 가운데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는 점에서 바울 서신과는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야고보서의 저자에 관해서는 논란이 많기는 하지만,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라는 게 일반적 통설입니다. 열두 사도 가운데 한 사람인 야고보가 아니라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입니다. 그 야고보가 직접 썼느냐 하는 점에서도 논란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후대의 어떤 저자가 썼다 하더라도 다른 야고보가 아니라 예루살렘교회의 권위자였고 ‘의인’으로 칭송받았던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의 권위에 의존하여 쓴 것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결론에 이르러 다시 생각할 문제이기는 합니다만, 바울의 주장과 야고보의 주장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일까요? 그렇게 다르다고 인식하는 것은 피상적인 견해일 뿐입니다. 야고보서가 말하고자 했던 근본 뜻을 오늘 본문말씀을 중심으로 함께 나누겠습니다.

본문말씀은 오늘의 시점에서도 새삼스럽게 부연설명을 하지 않아도 금방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명료합니다. 번역을 잘 해놔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야고보서는 그 자체로 매우 명료하고 유려한 그리스어스로 기록된 서신입니다.
오늘 본문말씀 첫머리는 그 자체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함축적으로 명료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
얼마나 분명합니까? 여기서 저자는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사람을 차별 대우하지 않는 것을 일치시키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은 곧 사람을 차별 대우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진실은 구약의 율법이 일깨워주는 것이자 동시 초기교회 당시 사도 바울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신도 많고, 주도 많으나, 너희의 주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시고, 참 주님이시다. 그분만이 크신 권능의 하나님이시요,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며,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시거나, 뇌물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시며, 고아와 과부를 공정하게 재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셔서 그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는 분이시다. 너희가 나그네를 사랑해야 하는 것은, 너희도 한때 이집트에서 나그네로 살았기 때문이다.”(신명 10:17~19)
“선한 일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먼저 유대 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함이 없이 대하시기 때문입니다.”(로마 2:10~11)
이 메시지는 성서 전체에 일관된 것이며, 사실상 핵심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성서 전체의 대강입니다. 야고보서는 성서의 근본이자 동시에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을 새삼 환기하고 있습니다.

굳이 그렇게 환기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사이에 차별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공동체 안에서마저 그 차별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2절부터 이어지는 말씀은 첫머리에 선포한 말씀에 대한 부연설명에 해당합니다. 저자는 공동체 안에 화려한 옷을 입고 금가락지를 낀 사람과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동시에 들어오는 예를 들고 있습니다. 그 선명한 대비와 함께 그에 대한 반응을 확인합니다. 화려한 옷차림을 한 사람에게는 호의를 보이며 좋은 자리에 않도록 권하는 반면 가난한 사람에게는 그냥 서 있든지 발치에 앉으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경우를 예로 들고 있지만, 실제로 교회 안에서마저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사람을 그렇게 차별하여 대한다면 그것은 나쁜 생각으로 남을 판단하는 것 아니겠느냐 묻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행위를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5절 이하의 말씀은,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는 말씀에서 한 걸음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택하여 믿음이 좋은 사람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다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 분명하게 알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진실을 외면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재삼 확인합니다.
여기에 덧붙여 부자들의 악행을 고발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압박하는 사람들도, 심지어 법정으로 끌고 가는 사람들도 그들이 아니냐고 단호하게 묻습니다. 재삼 확인하기를 하나님께서 주신 존귀한 이름을 모독하는 것도 그들 아니냐고 말합니다. 부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의 논리를 따르지 않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가난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고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심지어는 법정으로 끌고 가는 일,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답게 하는 일을 방해하고 저지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그리스도인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라는 것을 오늘 말씀은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존귀한 이름을 모독’한다는 것은 그런 뜻을 함축합니다.
이미 첫대목에서 확인한 것이지만, 사람을 차별대우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합치할 수 없다는 것이 오늘 말씀의 대전제입니다. 부자를 우대하고 가난한 사람을 멸시하는 것, 강자를 우대하고 약자를 멸시하는 것, 그것은 단지 인간들 사이의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저버린 행위입니다. 그 차별행위의 밑바탕은 사실상 유력한 사람을 숭배하는 믿음이 깔려 있습니다. ‘인물숭배’라고 할까요? ‘차별대우’, ‘불공평’, ‘외관에 대한 집착’은 힘에 대한 숭배요, 곧 그 힘을 가진 사람에 대한 숭배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러기에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는 상관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본문말씀은 편지를 받는 수신자들, 곧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런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단호하고 호소력 있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이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그렇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말씀은 그렇게 부정적인 물음으로 단호히 질책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8절 이하에서는 긍정적인 대안을 분명히 제시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의 근거를 분명히 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따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한 으뜸가는 법을 지키면, 그것은 잘 하는 일입니다.”
성서의 대강,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 무엇인지 다시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웃’은 본문말씀의 맥락에서 말하면 ‘가난한 사람들’을 뜻하고, 보다 폭넓은 성서의 맥락에서 말하면 ‘사회적 약자들’과 ‘소수자들’을 뜻합니다. 그 약자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성서가 일관되게 가르치고 있는 핵심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율법을 지키되 그 핵심을 간과한다면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될 것이고, 그렇게 율법을 어기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라 선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으뜸가는 계명으로서 ‘이웃사랑’을 언급하면서 ‘간음’과 ‘살인’을 언급한 까닭이 어디에 있을까요? 그 어떤 계명을 대비시켜도 논리적으로 문제없지만, 굳이 그 두 가지를 언급한 것은 그 나름의 의도가 있습니다.
이웃사랑을 거부하는 행위가 살인행위에 해당한다는 것은 구약성서 이래 오랜 가르침입니다. “이웃의 살 길을 막는 것은 그를 죽이는 것이며 일꾼에게 품삯을 주지 않는 자는 그를 살해하는 것이다.”(집회서 34:22) “사랑이 그 자체로 죽은 자를 살리고 죽음에 넘겨진 자를 불러 되살리려 하듯이, 증오는 살아 있는 자를 죽이며 작은 죄인을 살려두지 않는다. 증오의 영은 모든 사람에게서 그 편협함으로 역사하며 사탄과 함께 인간의 죽음을 향해 세력을 뻗치기 때문이다.”(가드의 유훈서 4:6~7) 예수님께서도 형제를 증오하는 것이 살인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말씀하셨는가(마태 5:21 이하) 하면, 요한1서 또한 같은 뜻의 말씀을 단호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형제나 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나 살인을 하는 사람입니다.”(요일 3:15)
간음을 언급한 것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부자를 우대하고 아첨하는 것은 곧 영적 간음이라 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라고까지 봤으니, 더 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성서가 이렇게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는데, 어째서 우리사회에서는 혐오의 논리의 진원이 기독교세력이 되고 있을까요? 요 며칠 사이 언론에서 확인되고 있듯이, 최근 우리 사회의 가짜 뉴스의 진원지가 ‘에스더’라는 이름의 유튜브 방송 아닙니까? 무슨 선교를 표방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게 선교입니까? 그리스도인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 아닙니까? 차별금지법을 반대하고, 인권조례를 반대하며, 반무슬림, 반동성애, 반패미니즘, 반난민을 주장하는 가짜 뉴스의 진원지입니다. 그에 현혹되는 다수의 기독교인들은 또 뭡니까?
문제는 그런 혐오와 증오의 논리를 받아들이는 풍토입니다. 어떤 것을 지향함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갖느냐, 어떤 것을 반대함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느냐 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 천당과 지옥의 차이를 지닙니다. 혐오와 증오를 유포하는 가짜 뉴스를 만들어내고 그에 현혹되는 기독교인들과 많은 사람들이 천당을 살고 있는지 지옥을 살고 있는지는 반문하지 않아도 압니다. 사랑하기에도 모자라는 삶인데, 증오하고 반대하는 데 정열을 쏟는 삶이어야 하겠습니까?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성경을 따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한 으뜸가는 법을 지키면, 그것은 잘 하는 일입니다.”
이 말씀을 따라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땅에서 평화를 이루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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