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신앙을 넘어 삶을 경외함 - 디모데전서 4:1~5[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8-10-07 14:21
조회
93
2018년 10월 7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거짓 신앙을 넘어 삶을 경외함
본문: 디모데전서 4:1~5



오늘 본문말씀은 사도 바울이 가장 아끼는 제자 디모데에게 주는 교훈으로 되어 있는 디모데전서 가운데 일부로, 잘못된 가르침을 경계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삶에서 무엇이 정말 중요한 것인지를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디모데전ㆍ후서가 과연 사도 바울의 친서인가 하는 점에 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바울의 친서라기보다는 바울의 가르침을 계승한 후대 교회의 교훈을 담고 있는 서신이라는 게 일반적 통설입니다. 특별히 디모데전ㆍ후서는 교회가 조직화되어 가는 국면에서 조직화된 공동체로서 교회의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관심이 깊게 배어 있습니다. 급진적인 복음의 의미를 설파한 바울의 입장과 조직화된 교회의 질서에 대한 관심이 깊게 배인 이 서신은 분명히 그 성격을 달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서신은 사도 바울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을 가르친 것은 아니고 그 핵심에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보여 주고 있습니다.

첫 대목은 잘못된 가르침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몇몇 사람들은 믿음에서 떠나, 속이는 영과 악마의 교훈을 따를 것입니다.” ‘속이는 영과 악마의 교훈’이라는 표현은 그 잘못된 가르침을 통렬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그 잘못된 가르침이 무시무시할 것이라는 예감을 가질 만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고 있는 그 잘못된 가르침은 딱 두 가지로 집약됩니다. “이런 자들은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을 먹지 말라고 할 것입니다.” ‘속이는 영과 악마의 교훈’이라고 말한 것치고는 그렇게 무시무시한 가르침은 아닙니다. 이걸 두고 그렇게 극단적인 언어로 경계를 표해야 했던 까닭이 무엇일까요? 서신은 이를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한 교훈은, 그 양심에 낙인이 찍힌 거짓말쟁이의 속임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양심에 낙인이 찍혔다’? 그 의미가 좀 약화된 느낌이기는 하지만 오늘 일상 언어로 말하면 아마도 ‘양심에 털 났다’라는 말 정도로 보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양심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동기 자체가 사악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결혼하지 말라’, ‘음식을 가려 먹어라’ 하는 가르침이 어째서 그렇게 심각하게 지탄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요? 이건 쉽게 이해하자면 금욕주의적 가르침 아닙니까? 어떤 면에서는 일반인과 종교인을 가장 분명하게 구별해주는 금욕주의적 가르침입니다. 이 점에서 가장 종교적인 가르침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비단 결혼 문제와 음식 문제만이 아니라 종교적 가르침은 많은 금기사항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여러 금기사항 가운데 일부로 결혼과 음식에 관한 문제가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묻지만, 상식적으로 볼 때 가장 종교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가르침이 그렇게 통렬하게 비판을 받아야 하는 까닭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 까닭을 생각하는 데 예전에 우리 교회에서 함께 공부했던 도마복음서의 한 구절은 떠올려보면 좋을 것입니다. 도마복음서 14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금식을 하면 여러분은 여러분 스스로에게 죄를 가져올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를 하면 여러분은 정죄를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구제를 하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영을 해치게 될 것입니다.”
더 어려워졌나요? 신앙을 추구하는 데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갖는 함정을 일깨워주는 말씀으로써 깊이 새겨야 할 경구입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먹어야 하느니 말아야 하느니 하는 것을 따지는 것 자체가 자유롭지 못한 상태로서 이미 죄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말하며, 진정한 내면의 성찰로서 기도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남들 앞에서 옳게 기도했는지 그르게 기도했는지 의식하는 것 자체가 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구제는 고귀한 행위이지만 그것은 근본적으로 삶의 관계를 개선하지 못하고, 나아가 그 행위를 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우월성을 드러내게 한다는 점에서 영혼을 해친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없는 종교행위, 진정성이 없는 겉치레뿐인 종교행위를 질타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자기 스스로를 속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마저 현혹시키는 속임수의 해악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잘못된 가르침을 경계하라는 이야기는 그 가르침이 많은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금욕주의의 이상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니체는 금욕주의의 이상이 특별히 성직자에게는 권력추구의 가장 좋은 도구요 권력에 대한 최상의 면허증이라고 꼬집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허무에의 의지이며, 삶에 대한 혐오이며, 삶의 가장 근본적인 전제들에 대한 반역일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너무 심한 말일까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더라도, 역사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우리는 그 말이 정곡을 찌르고 있다고 동의할 수밖에 없는 사태들을 알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가장 거룩하고 가장 정통적이라고 자처하는 집단이 속으로는 가장 타락했던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을 수호한다며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차별하는 행위, 바로 그 행위의 정당성을 내세우며 자신의 치부를 가리고 있다면 딱 그런 경우에 해당합니다. 여러 금기를 지키며 경건한 척 하지만 사실은 맘몬을 섬기고 자기 자신을 섬기는, 이름뿐인 기독교인들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거룩함을 빙자하여 스스로를 속이고 남을 옭아매는 사태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당시의 영지주의자들이 그런 과오에 빠져 있다고 경계한 것입니다.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삶을 부정했던 영지주의자들의 과오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일까요? 3절하반절 이하에 그 답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 음식물은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과 진리를 아는 사람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게 하시려고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은 모두 다 좋은 것이요,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집니다.”
이 대목에서 사도 바울의 입장과 같으면서도 다른 미묘한 점이 분명해집니다. 우선 결혼문제를 꺼냈는데, 그 답에서는 결혼문제가 살짝 빠지고 음식문제만 나옵니다. 음식문제에 관한 태도에서 저자의 입장과 사도 바울의 입장은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결혼에 관한 문제에서 사도 바울과 저자는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어디에서도 결혼 그 자체가 선이다 악이다 하는 판단을 전제하지는 않지만,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가능한 한 결혼하지 말 것을 권하는(고전 7:8) 반면 디모데전서의 저자는 가능한 한 결혼을 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디전 2:14). 여기서 우리는 많은 종교적 계율과 윤리가 상대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쨌든 저자는 그 미묘한 차이를 의식하고 있었기에 그 문제를 재론하지 않고 음식문제로만 답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초기 그리스도교의 공통된 가르침의 핵심이 있습니다. 베드로에게서도, 바울에게서도 공통되었던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 가운데 악한 것이 따로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것을 감사히 알고 선용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이지, 이건 선하고 저건 악하고 규정짓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은 모두 다 좋은 것이요,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 말씀의 진정한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물질세계를 악한 것으로, 육체적 삶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삶의 태도를 경계하고, 이 땅 위에서 누리는 인간의 삶, 모든 피조물의 삶에 대한 진정한 긍정을 역설하는 데 그 근본 뜻이 있습니다. 생명에 대한 경외감, 삶에 대한 경외감에 그 근본 뜻이 있습니다. 이 진실을 받아들일 때 세상에 어떤 위계질서를 세우고, 등급을 매기는 것은 허용될 수 없습니다. 더 소중한 것과 덜 소중한 것, 더 귀한 것과 덜 귀한 것의 구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사람들을 이러저런 이유로 하찮은 것으로, 차별하고 배제해야 할 대상으로 구별하는 세상의 인식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삶에 대한 경외감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을 한갓 수치로 또는 그저 대상화된 집단으로 환원하는 발상이 만연합니다. 사람을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많은 경우가 이에 해당합니다. 나아가 사람을 사람이 아니라 그저 도구로 여기는 몰상식이 상식으로 통용됩니다. 기업의 생존을 위해 구조조정을 한다면서 어째서 사람의 생존권을 박탈하는 것을 능사로 압니까? 사람을 하나의 부속품, 하나의 비용으로만 간주하는 발상에서 비롯됩니다. 그것은 인간의 삶을 타락시킬 뿐 아니라 온 생명 자체를 타락시킵니다. 인간이 도구로 활용되는 지경인데 자연은 어찌 되겠습니까?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새겨야 할 것은 진정으로 삶에 대한 경외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시고, 사람을 지으신 뜻입니다. 그 믿음을 가질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속이는 일에서부터 해방됨은 물론 타인을 속이고 속박하는 일로부터 또한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나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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