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진실을 딛고 일어서야 - 요한계시록 6:9~11[여순항쟁 70주년 추모예배]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8-10-19 23:40
조회
137
2018년 10월 19일(금) 오후 2:00 여순항쟁 70주년 추모예배
제목: 불편한 진실을 딛고 일어서야
본문: 요한계시록 6:9~11



1948년 10월 19일, 그로부터 딱 만 70년이 되는 오늘, 여순항쟁 70주년을 맞이하여 드리는 추모예배, 그 가운데서 말씀을 나눠야 하는 마음이 편할 수가 없습니다. 제 순번이 아닌 것 같은데, 떠밀려 맡게 되었습니다. 떠밀려 맡지 않았다면 어찌 자청해서 맡겠다고 할 수 있었겠습니까? 공교롭게도 지난 봄 제주4.3 70주년을 맞이했을 때도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4.3평화기행 때 그 때 역시 제 순번이 아니었는데 갑작스럽게 대표 격을 맡아야 했습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제주4.3’과 ‘여순항쟁’을 기리는 일에 연이어 연루되었으니, 거기에 미처 스스로 가늠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뜻이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이 자리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난 봄, 그리고 한 달 전 두 차례에 걸쳐 제주4.3항쟁의 유적지와 평화공원을 방문하면서 전율하였습니다. 아름다운 평화의 섬 제주가 안고 있는 민족의 상처, 아니 냉전체제가 빚어낸 세계사적 차원에서의 반인륜적 참극의 상처를 들춰내고 확인하는 것이 어찌 마음 편한 일이겠습니까? 여순항쟁의 진실을 마주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제주가 평화의 섬으로 불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수 역시 미항으로 불리지 않습니까? 그 아름답고 평화로운 이름 뒤에 감춰진, 아직까지 아물지 않은 상처를 확인하는 일이 마음 편한 일일 수 없습니다.

서로 얽혀 있는 두 사건의 진실이 무엇입니까? 먼저 4.3의 진실이 무엇입니까? 1948년 4월 3일, 아니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에 이르기까지 제주에서는 숱한 사람들이 절규하며 쓰러져갔습니다. 진상조사위원회에 신고된 희생자만도 약 15,000명에 이르고, 실제 희생자 수는 25,000~30,0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들은 독립된 자주국가 안에서 평화롭게 삶을 누리기를 바랐습니다. 그것이 비극을 초래할 일은 아니었습니다. 외세의 지배를 물리치고 하나된 조국 안에서 평화로운 삶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들의 당당한 외침이었고, 마땅한 외침이었습니다. 그러나 비극은 그 외침을 두려워하는 자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막 시작된 냉전체제의 당사자인 미국과 그 체제에 편승하여 분단국가 안에서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했던 이들은 그 외침을 두려워하였고, 마침내 무자비한 폭력으로 그 당당한 목소리를 틀어막고 이루 말할 수 없이 숱한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그 사건은 한국 현대사에서 지을 수 없는 중대한 사건이었을 뿐 아니라 세계사적 차원에서 막 시작된 냉전체제의 잔혹성을 단적으로 드러내 준 사건이었습니다. 그 사건은 제2차 대전 이후 미군의 지휘 아래 자행된 동아시아 민중학살의 ‘원점’이요, ‘원형’이었습니다. 그것은 이념과 체제에 의해 자행된 반인륜적 범죄의 한 원형이었습니다.

여순항쟁의 진실은 무엇입니까?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한 국군 제14연대 병사들이 제주4·3사건 진압명령을 거부하고 단독정부 수립반대와 미군 철수를 주장하며 일으킨 항쟁입니다.
“우리는 제주도 애국인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해 우리들을 출동시키려는 작전에 조선 사람의 아들로서 조선동포를 학살하는 것을 거부하고 조선 인민의 복지를 위하여 총궐기하였다. 1. 동족상잔 결사반대 2. 미군 즉시 철퇴”
여순항쟁은 이제 막 그 마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냉전체제에 대한 저항에 더하여 동족상잔의 학살을 거부함으로써 반인륜적 범죄행위에 가담할 수 없다는 숭고한 저항의 정신을 드높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숭고한 정신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은 15,000에 달하는 사람들의 희생과 더불어 비극으로 일단락되었습니다. 제주4.3이 막 시작된 냉전체제에 의한 민중학살의 원점이었다면, 여순사건은 그 체제가, 그 체제에 동의하지 않는 한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과 같은 삶을 보장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암울한 경고였습니다. 사실상 분단체제를 민중들의 내면으로부터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강력한 반공국가를 구축하지 않았습니까?

오늘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후벼 파는 그 비극의 실상을 다시금 환기하며, 치유의 방법을 찾기 위해 이 자리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저는 이 시간 그 사건으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는 여정을 전망하는 말씀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사건의 상처를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쓰라린데, 말씀으로부터 희망의 용기를 얻고 위로를 나눠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눈길이 그렇게 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비극의 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증언하도록 일깨우는 말씀에 눈길이 닿았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요한계시록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불편한 진실을 다시금 환기하는 오늘 우리는 거기에 더하여 또 불편한 성서 본문말씀을 함께 읽은 셈입니다. 어쩌면 그리스도교의 신앙 자체가 가장 불편한 진실, 가장 참혹한 비극의 사건을 기억하는 데서 시작되지 않습니까? 단지 사랑의 삶, 인간이 진정으로 인간답게 사는 길을 실천했을 뿐인 예수께서 당대의 지배체제에 의해 가장 처참한 십자가 극형을 당했던 사건, 역설적으로 그 비극적 사건이 보여준 구원의 능력을 믿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입니다.
그 믿음의 눈으로 볼 때,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바로 우리의 역사 현장,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일어난 사건의 의미를 제대로 되새길 수 있는 통찰을 주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1세기 전후 로마제국의 극심한 박해시기에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희망을 선포하는 신앙고백입니다. 요한계시록 6장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처해 있는 현실을 폭로함과 동시에 그 파국의 종말, 그러나 끝내 이뤄질 그리스도의 승리에 희망을 전하고 있습니다. 어린양이 하나하나 봉인을 떼어낼 때 그 하나하나의 진실이 드러납니다. 들을 귀가 있다면, 이 말씀들이 오늘 ‘팍스아메리카나’ 현실에서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봉인을 뗄 때, ‘흰말을 탄 사람이 면류관을 받고 나아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로마제국의 정치적 권력을 상징합니다. 로마제국 황제의 끊임없는 정치적 지배의 욕망, 그에 사로잡힌 세계 현실을 말합니다.
둘째 봉인을 뗄 때, ‘붉은 말을 탄 사람이 평화를 걷어 버리고 사람들을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로마제국의 군사적 지배를 상징합니다. 군사적 폭력으로 세계를 지배하고자 하는 야욕, 그에 신음하는 세계 현실을 말합니다.
셋째 봉인을 뗄 때, ‘검은 말을 탄 사람이 손에 저울을 들고 있다’고 했습니다. 저울은 상거래를 상징하는 것으로, 로마제국의 경제적 세계 지배를 말합니다. 그 경제적 지배는 공정하지 않습니다.
넷째 봉인을 뗄 때, ‘청황색 말을 탄 사람의 이름은 사망인데, 그를 뒤따르는 지옥의 무리들 곧 칼과 기근과 죽음이 사람들의 사분의 일을 멸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지배의 귀결이 재난과 역병, 결국 죽음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다섯째 봉인을 떼었을 때,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또 그들이 말한 증언 때문에, 죽임을 당한 영혼을 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넷째 봉인을 뗄 때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현실을 지배하는 죽임의 세력의 실체를 드러내주고 있다면, 다섯째 봉인을 뗄 때 그 죽임의 세력에게 죽임당한 사람들의 실상이 드러납니다. 이 장면은 예사롭지 않습니다. 죽임당한 수많은 영혼들이 자신들의 죽음을 신원하여 주기를 간청합니다. 그런데 그에 대한 응답은 없습니다. 요한은 최후의 심판, 그리고 이어지는 그리스도의 최후의 승리를 확신합니다. 그런데 그에 대한 응답은 죽임을 당하기로 되어 있는 사람들의 수가 차기까지 아직도 더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섯째 봉인을 뗄 때, 임박한 심판의 실체가 드러납니다. 자연현상이 기이한 조짐을 드러내고 죽음의 냄새가 천지를 진동합니다. 심판받는 주인공들이 열거되는데, 왕들과 고관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세도가들입니다. 여기에 또 의미심장한 목록이 있습니다. 그 심판의 대상에 노예와 자유인 또한 포함됩니다. 그것은 불의한 로마제국의 지배에 굴종하고 타협하며 죽임의 권세에 직간접적으로 빌붙어 사는 ‘노예’, 그리고 이웃의 고통을 외면한 채 자기들만의 천국을 누리고 있는 자유로운 시민들 또한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과정이 끝나고, 7장 이하에서 일곱 번째 봉인을 떼고 나서야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립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대목은 다섯 번째 봉인을 뗄 때의 장면입니다. 이 환상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이것은 예수의 부활 승리로 말미암아 사탄의 세력이 이미 극복되었지만, 그 잔당의 횡포와 발악이 아직 잔존하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로 인해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는 하나님 나라는 아직 완전하게 실현되지 않은 상태에 있고, 의롭고 진실하게 살려는 이들에 대한 죽임과 박해, 그리고 억압과 음모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것은 자포자기의 상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현실에 대한 냉철한 인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죽임의 세력이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냉철한 인식입니다. 여기에 이어지는 여섯째 봉인을 뗄 때의 상황, 곧 심판의 상황은 지금 다섯 번째 봉인을 뗄 때의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결단을 촉구합니다. 과연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촉구합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과연 어떤 시대일까요? 민주주의가 신장되고 생명과 평화의 삶에 대한 갈망이 사람들 가운데 충일하지만, 여전히 그것을 방해하는 세력이 아직 존재합니다. 그 가운데서 생명과 평화의 길을 선택할 것을 촉구 받고 있습니다. 그 점에서 다섯 번째 봉인이 떼인 그 상황과 같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말씀이 전하는 바와 같은 아직도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수가 더 차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결코 “아멘” 하기 어렵습니다. 지난 70년이 바로 그런 상황 아니었습니까? 이어진 한국전쟁과 그 와중에서 숱한 학살이 이어졌습니다. 전국토가 무고한 사람들의 피와 눈물로 흥건히 젖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1980년 광주에서 학살이 일어났습니다. 지배체제와 국가권력에 의한 살인이 계속되었습니다. 그 체제에 저항하며 목숨을 던진 사람들까지 더하면 그 비극은 그 이후로도 지속되었습니다. 2014년 세월호 사건, 그리고 세월호 사건 희생자의 6배에 달하는 사람들이 매년 자신의 일터에서 죽어가는 상황을 생각하면, 그 이상의 죽음의 필요하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이제 그만!”이라고 외쳐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오늘 여순항쟁의 숭고한 정신을 되새기며, 그 희생자들의 피울음을 다시 불러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피울음에 응답하는 길이 무엇일까요?
체제와 이념의 대결이 낳은 참극을 낡은 시대의 유물로 돌리고 진정한 평화를 이루는 길입니다. 이 땅에 진정한 평화가 이뤄져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삶을 스스로 결정하고 정겨운 살붙이와 이웃들, 그들과 더불어 사소한 일상의 삶을 기쁨으로 만끽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비극으로 인한 상처의 치유가 이뤄질 것입니다.
다행히 오늘 한반도에는 평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치유의 여정이 이제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70년이 지난 오늘에야!
그 여정이 중단되지 않고, 마침내 정의와 평화의 세계 안에서 억울하게 희생당한 영혼들이 진정으로 위로와 평안을 누리고, 우리 모두가 기쁨을 나누게 되는 그날까지 계속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마음을 모으고 기도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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