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조건, 감사의 조건? - 예레미야 29:4~14[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8-10-21 14:45
조회
131
2018년 10월 21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삶의 조건, 감사의 조건?
본문: 예레미야 29:4~14



예언자 가운데 예레미야는 가장 인상 깊고 독특한 예언자입니다. 나라가 멸망하고 민중들이 고통을 겪어야만 했던 시기에 온 삶으로 예언을 선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깊은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선포와 기인행각을 하고 있어서 독특합니다. 나라가 망해 가는데 땅을 산다든지, 또 한 쪽으로만 모로 눕는다든지 여러 기인행각을 벌이기도 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선포를 빈번하게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말씀도 이상한 말씀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예레미야가 바빌로니아로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정확히 말해 유다의 장로들과 제사장들과 예언자들과 그 밖의 여러 백성에게 전한 편지입니다. 아직 유다가 완전히 멸망하기 이전 유다에 시드기야 왕이 다스리던 때에 보낸 편지입니다. 그러니까 이 편지의 수신인들은 유다 멸망 이전에 1차로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편지가 이상하다는 것은, 그 내용이 한마디로 말해, ‘딴 생각 품지 말고 바빌로니아에서 정착하여 살아라’ 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5절 이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면 이렇습니다.
“너희는 그 곳에 집을 짓고 정착하여라. 과수원도 만들고 그 열매도 따 먹어라. 너희는 장가를 들어서 아들딸을 낳고, 너희 아들들도 장가를 보내고 너희 딸들도 시집을 보내어, 그들도 아들딸을 낳도록 하여라. 너희가 그 곳에서 번성하여, 줄어들지 않게 하여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에 이어지는 말씀은 더더욱 놀랍습니다. “또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이 평안을 누리도록 노력하고, 그 성읍이 번영하도록 나 주께 기도하여라. 그 성읍이 평안해야, 너희도 평안할 것이기 때문이다.”
붙잡혀 간 것도 억울하고 그래서 무장봉기라도 일으켜 민족의 독립을 되찾으려는 노력을 해도 시원찮을 판에, 지금 붙잡혀 살아가고 있는 나라가 잘 되기를 기원해가면서까지 정착해서 살라고 하니, 도무지 당시 민족적 정서에 비추어볼 때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시편 137편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의 사무친 원한은 바빌로니아의 어린 아이들마저도 바위에 메어치고 싶다고 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이렇게 이상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이 편지의 내용은 점입가경입니다. 8절 이하를 보면,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을 부추기며 빠른 시일 안에 포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를 불어넣었던 예언자들과 점쟁이들이 있었습니다.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들의 말을 따라 모종의 소요를 일으켰던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에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나라를 빼앗긴 경험을 갖고 있는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이 오히려 정당하고 마땅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이들을 딱 꼬집어 지적하면서 그들은 하나님이 보낸 예언자가 아니므로 그들의 말에 현혹되지 말라고 합니다.
사실 이 편지의 내용이 전해진 직접적인 배경도 그 때문입니다. 당시 상황 가운데서 전혀 가능하지 않은데도 곧 귀환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로 사람들을 선동하고, 그 선동에 부화뇌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 편지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이 편지를 우리는 과연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우리는 이를 쉽게 이해한다면, 예레미야의 현실론, 혹은 실용주의적 권고라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무슨 짓을 해도 어쩔 수 없으니 몸이나 다치지 않게 잘 지낼 궁리를 해라!’ 하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보는 것도 전혀 틀린 추측은 아닐 것입니다. 실제로 한창 강성해지고 있는 바빌론제국의 힘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다 왕국 사람들은 또 다른 강대국 이집트에 의존해서 바빌론을 막아보려는 시도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 일이 바빌론의 분노를 사 유다가 멸망하게 되는 결정적 기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레미야의 권고는 확실히 현실을 제대로 알고 순응하라는 이야기라고 보는 것이 전혀 무리는 아닙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이 예언의 참뜻은 단순히 현실 순응의 논리를 가르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진정한 신앙의 안목, 진정한 역사의식에서 비롯된 말씀입니다. 진정한 신앙, 진정한 역사의식은 있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현실을 호도하거나 헛된 환상으로 사람을 미혹하지 않습니다. 당장 고통스럽더라도 그 고통의 현실을 직시하고 오히려 그 고통의 현실을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을 것을 가르치는 것이 진정한 신앙이요 역사의식입니다.
그 인식은 막연한 어떤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구체적인 삶의 태도와 직결되는 인식입니다. 지금 여기에서의 삶을 소중히 여기는 삶의 태도와 직결됩니다. 지금 여기에서의 삶은 어떤 이유로든 유보될 수 없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어떤 형편에 처해 있든 지금 당장 누리는 삶은 소중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지금 여기에서의 자신의 삶을 구가할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의 삶의 소중함을 아는 태도는 그저 현실주의적 삶의 태도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삶 자체를 한 순간이라도 가벼이 여기지 않고 무겁게 받아들이며 그만큼 진지하게 삶에 임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그 어떤 것으로 대신할 수 없는 그 순간순간을 온전히 살아내는 태도를 뜻합니다.
예레미야가 포로로 잡혀간 이들에게 권하고 싶었던 것은 그것입니다. 자기 땅이 아닌 남의 땅에서 굴종을 강요당하며 사는 것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뜻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저마다의 삶을 결코 가벼이 할 수 없는 삶의 근본 태도를 환기하고자 하는 뜻을 지닌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권고는 하나의 현실론이거나 숙명론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 권고는 결코 미래의 희망을 저버리라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예레미야는 결코 미래의 희망을 포기하라고 이르지 않습니다.
“나 주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바빌로니아에서 칠십 년을 다 채우고 나면, 내가 너희를 돌아보아, 너희를 이 곳으로 다시 데리고 오기로 한 나의 은혜로운 약속을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 주겠다.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오직 나만이 알고 있다. 내가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재앙이 아니라 번영으로서, 너희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는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여기서 70년을 기다리면 포로로부터 해방을 시켜주겠다고 했는데, 실제 그 기간은 바빌론 포로기의 역사와 거의 일치하고 있습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그 긴 기간을 절망과 한탄으로 보내기보다는 삶을 삶답게 누리기를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 상황이 어떠하든 사람이 마땅히 누려야 할 삶은 유보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중요한 전제가 하나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부르고, 나에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의 호소를 들어주겠다. 너희가 나를 찾으면, 나를 만날 것이다.” 그러면 비로소 포로생활에서 벗어나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전제는 포로생활 가운데서도 누려야 할 삶을 누리라는 권고와 그대로 맥이 통하는 말씀입니다. 집을 짓고 농사를 짓고 가정을 일궈 번성하라는 권고는, 포로로 붙잡혀 있는 상태로 도저히 그런 안락한 생활이 불가능할 것 같은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권해진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라는 것 역시 똑 같은 조건에서입니다. 자기 땅에서 뿌리를 뽑혀 남의 땅에서 살게 되었을 때 그 조건이 어땠을까요? 더 이상 성전도 없고 따라서 조상 대대로 지켜왔던 예배를 온전히 드릴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통념으로 생각하면 도대체 어디 가서 하나님을 찾고 기도한단 말인가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뜻, 하나님을 섬기는 격식의 근본적 변화가 일어납니다. 새로운 종교의 탄생, 새로운 믿음의 탄생 계기가 됩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너희가 온전한 마음으로 나를 찾기만 하면, 내가 너희를 만나 주겠다. 나 주의 말이다.”
다시 한 번 환기하자면 당시 유대인의 통념에 비추어볼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정해진 격식에 따라 드리는 예배만이 온전한 예배였습니다. 그것이 불가능해진 조건에서 그 온전한 예배 또한 불가능하다는 것이 당시 유대인들의 상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그런 조건이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온전한 마음으로 나를 찾기만 하면, 내가 너희를 만나 주겠다.”는 말씀, 그것은 기왕에 하나님을 만나는 조건을 무력화시키고 스스로의 인격으로 온전히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종교, 새로운 믿음의 탄생입니다. ‘지금 너의 삶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데 결여된 조건은 없다.’ 이런 선언입니다.
이 뜻에 비추어 앞에서의 권고, 삶에 대한 권고가 지니는 뜻을 새기면 ‘지금 네가 온전한 삶을 누리는 데 결여된 조건은 없다.’ 하는 것이 됩니다. 진정한 삶에의 의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삶에의 의지가 있다면 어떤 조건의 결여를 탓하며 지금 누려야 할 자신의 삶을 유보해야 할 까닭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마도 널리 회자되는 이야기이기에 한 번쯤 들어봤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인도에서 휴가를 보내는 한 사업가의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피에르 신부의 <단순한 기쁨>에 소개된 이야기입니다.

인도로 휴가를 떠난 한 사업가가 모래사장에서 물고기를 한 마리 들고 돌아오는 한 어부를 봅니다. 어부가 잡은 것에 감탄하며 그가 말합니다.
“좋으시겠습니다! 또 잡으러 갈거지요? 그 때 나도 함께 가겠습니다. 어떻게 고기를 잡는지 내게 설명해주셔야 합니다.”
“또 잡으러 가다니, 뭐하게요?” 어부가 묻습니다.
“물고기를 더 많이 갖게 되지 않습니까?” 사업가 되묻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는 계속되는데...
“그러면 뭐하게요?”
“작은 배 한 척이라도 살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면 뭐하게요?”
“그 작은 배로 더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뭐하게요?”
“일꾼들을 쓸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면 뭐하게요?”
“그 사람들이 당신을 위해 일할 겁니다.”
“그러면 뭐하게요?”
“당신은 부자가 될 겁니다.”
“그러면 뭐하게요?”
“그러면 쉴 수 있을 겁니다.”
그러자 어부가 말했습니다. “쉬는 건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한데요.”

뭔가 많은 조건을 갖추어야 제대로 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며, 지금 당장 소중한 삶을 영위하지 못하는 우리 삶의 실상을 되돌아보게 해주는 일화입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물질적 조건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먹고살기에 충분한데도 왜 세상은 경제의 규모를 더 키우기 위해 발버둥 칠까요? 그러면서 어째서 다수의 사람들에게 지금 당장의 삶을 유보하도록 희생을 강요하는 것일까요? 바로 그 삶의 방식의 미망, 거짓 예언에서 벗어날 때 인간에게 희망이 있지 않겠습니까?

오늘은 특별히 우리 교회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입니다. 특별히 거둔 것이 많아야만 감사할 수 있을까요? 물론 대개 마음이 그렇습니다. 그렇게 감사할 만한 조건이 많다면 그런 만큼 큰 기쁨일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 이전에, 한 순간 한 순간 저마다의 소중한 삶을 영위해나가는 것 그 자체로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지금 이 순간 저마다의 삶을 돌아보기를 바라며, 내가 왜 하나님께 감사하고 지금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가족과 이웃에 감사해야 하는지 그 진정한 까닭을 새겨보기를 바랍니다. 그에 대한 깨달음으로 진정으로 풍요로운 삶을 누리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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